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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러시아 지식인들의 분발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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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러시아 지식인들의 분발을 기대하며

입력
2000.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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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20여일에 걸쳐 몇 몇 동료와 함께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할 기회가 있어 그 참에 8박9일 동안 러시아를 방문했다. 비교적 긴 러시아 일정이 짜여진 데 대해 이 나라 역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적지않은 한국인들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정치적, 사회경제적 혼란을 겪고있는 이 거대한 나라를 은근히 얕보는 것이 사실인데 러시아의 풍부한 전통문화를 접하고 인간미 넘치는 현지인들과 직접 접촉하면 그런 인상이 바뀔 것이라는 게 필자의 기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이 그같은 희망을 충족시켜 주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우선 지나치게 엄격한 입출국 및 세관신고 절차와 호텔이나 거리에서 거듭되는 여권규제 때문에 심한 불편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입국할 때 절차를 잘 몰라 세관신고서에 관리의 도장을 받지 않았던 한 동료는 출국할 때 그 신고서와 새로 작성한 신고서를 함께 내밀었다가 입국신고서에 도장이 찍히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액의 외환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외환을 모두 압수당할 뻔했다.

그런가 하면 관광객인 우리가 탄 미니버스가 모스크바 시내를 달리고 있는데 추월위협을 당했다고 생각한 차량에서 무장 군인들이 튀어나와 우리 모두에게 긴 총을 들이대고 여권 제시를 요구하기도 했다.

어떤 창구이건 앞에 앉았다하면 융통성 없이 대하는 관료들의 태도, 대규모 국제호텔에서 밤 열시 반이 넘어 시작된 정전이 한 시간 반이나 계속됐는데도 불안해하는 투숙객들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방송 한마디 없이 출입객들을 줄기차게 고압적인 방식으로 통제하는 경비원들의 모습 등은 이 사회가 구성원들을 성숙한 시민으로 대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행 중 어떤 분은 여행 이전보다도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이 나라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시베리아 튜멘대학의 역사학부장 콘드라치예프 교수처럼, 불시에 들이닥친 한국인 여행객들을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라인을 통하여 우리 일행의 여행목적에 맞을 만한 방문장소를 물색해 주는 인물을 만날 수 있었던 곳도 역시 러시아였다.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친절함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사적인 영역에서 만났을 때와 공적인 영역에서 만났을 때 180도로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러시아인들이다. 공적인 영역은 여전히 강압적인 권력행사의 영역이자 직위소지지가 타인에게 군림하는 영역이고, 사적인 영역만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가치가 발현되는 부문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통제사회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이야기인데 국가권력과 이른바 올리가르키(과두 금융·언론재벌)의 횡포를 견제할 만한 강력한 지식인, 시민운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장은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수월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비판적 지식인을 뜻하는 인텔리겐챠라는 말이 러시아어에서 비롯되었듯 제정시대 이래 러시아 지식인들은 사회정의를 위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투쟁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소련체제 하에서 정신적 독립성을 지닌 지식인들에 대해 가해졌던 체계적 박해로 인해 그들은 지금 소수인데다 무척 지쳐 있다.

그들은 새로운 이념을 열심히 찾고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 러시아적 가치에 대해서도, 서구적 가치에 대해서도 비판적 지식인들이 합의하지 못하고 있고 이것이 러시아의 사회개혁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지식인들이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입장이나 개혁 허무주의적인 입장을 버리고 민주적인 사회의 건설을 위해 앞장설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 본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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