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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확인 실향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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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확인 실향민

입력
2000.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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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읍니다. 응석받이였던 아들 놈이 벌써 쉰이 넘었는데 그동안 애비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을 신청했다가 북한에 처자식과 친동생 두명, 사촌동생이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은 한재일(韓載一·76)씨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신청시 8명 가족의 이름을 올렸던 한씨는 세상 뜬 부모님과 둘째 동생을 제외하고 처 김순실(金順實·75), 아들 영선(榮善·54), 동생 재삼(載三·69) 재실(載實·여·63), 사촌동생 재홍(57)이 모두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평남 평원군 공덕면 산송리에서 자작농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한씨는 징집을 피하기위해 47년 평남 순안기계제작소에 자원해 취직했으나, 50년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 대공포부대에 끌려가면서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비행기를 쏘는 일이었어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몇 전투에 참가했다가 마지막 낙동강에서 패전한 뒤 부대를 이탈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에만 산을 타면서 하염엾이 북쪽으로 걷다 한 여자를 만난 것이 남한에 눌러앉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 여자가 지금의 아내인 소복순(蘇福順·77)씨. 슬하에는 옥자(玉子·48·여)와 영천(榮泉·45·운수업)씨 남매를 두었다.

한씨는 “자유당 시절에는 군수품을 팔아 제법 돈을 모으기도 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면서도 “북에 갈때 만약 가져갈수만 있다면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라도 사 아들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 소씨도 “남편은 늘 북에 두고온 아들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했다”면서도 “하지만 나를 의식해서인지 북의 부인 얘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남북의 아들이 서로 형제로 다정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에는 절을 올리며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빌 참입니다.”주름깊은 한씨의 얼굴에는 어느새 굵은 눈물이 매달렸다.

장래준기자

rajun@hk.co.kr

■ 포로출신 최태현옹

"보면 먼저 미안하다 해야지"

아내와 아들, 누나와 동생 등 북녘 혈육 6명의 생존을 확인한 최태현(崔泰賢·70·인천 부평구 부평2동)씨는 “가족 대부분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꿈만 같은 일”이라며 “만나면 ‘미안하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하고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14살 어린 나이에 두 살위인 박택용(72)씨와 결혼, 고향인 평북 시천군 동창면 석포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던 최씨는 한국전 발발 이듬해인 51년 6살난 아들 희영(53)씨와 갓 태어난 딸을 두고 인민군에 징집됐다.

제대로 군사훈련도 못받은채 전선에 투입된 최씨는 곧 강원 고성전투에서 국군에 포로로 잡혔고 이후 북으로의 송환을 거부, 혼자 남쪽에 남았다.

“미처 딸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상태에서 징집됐는데, 그 딸의 이름은 북에서 보낸 가족명단에도 없습디다. 더구나 생전에 꼭 한번 보고싶었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강원 탄광촌에서 일을 하던 중 현재 부인을 만나 결혼, 아들(38) 하나를 두고있는 최씨는 “지금의 아내와 아들이 나보다 더 북한가족들을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수십년 응어리 풀리는 기분"

전쟁통에 헤어진 아내와 자녀들을 50년만에 만나게 된 최경길(崔京吉·78·경기 평택시 팽형읍)씨는 27일 뜻밖에 부인 송옥순(75)씨와 아들 의관(55)씨, 딸 의실(53)씨의 생존소식에 접하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함북 길주가 고향인 최씨도 많은 실향민들이 그러했듯 난리통에 “잠깐 남쪽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것이 마지막. 같은 함경도 출신의 새아내를 맞아 1남1녀까지 두었지만 북에 둔 가족생각에 마음이 늘 편치 않았다. “면사무소에서 퇴근할때면 4살난 의관이가 골목에 뛰어나와 안기곤 했다”는 최씨는 “착했던 북의 아내는 얼마나 변했는지…”라고 목이 메었다.

최씨는 “5년전 새아내가 세상을 뜨고 난 뒤 북에 두고온 가족을 꼭 만나야 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며 “8·15 이산가족 방북단 소식을 듣고 그날 바로 서울로 올라가 상봉신청을 했는데 소원이 이렇게 쉽게 이뤄질지 몰랐다”고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가 북녘 가족생각에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며 늘 마음이 아팠다는 아들 의범(47)씨와 며느리 문정숙(48)씨는 “수십년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라며 “북녘 형님과 누님 얼굴을 빨리 보고 싶다”고 함께 기뻐했다.

/배성규기자 veg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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