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사 신관 건물 로비에는 한국일보 창간호의 1면 지면을 확대한 동판 액자가 걸려 있다. 1954년 6월9일자 조간신문이다. 그날 톱기사는 ‘제3기 민의원(民議院) 드디어 오늘 개막’이지만, 나머지 지면은 거의 전부 ‘수부(壽府)회의’ 관련 외신으로 채워졌다.‘수부회의’?
요즘 독자들로서는 생소한 말이기 쉽다. 신문도 물론 요즘과는 딴판이다. 온통 한자 제목으로 도배돼, 한글은 거의 토씨로만 쓰이는 수준이다.
‘수부’는 제네바의 한자 표기다. 모스크바를 ‘막부(莫府)’ 워싱턴을 ‘화부(華府)’로 쓰던 때다. 한국일보 창간호에 집중보도된 ‘수부회의’는 당시 4월26일부터 6월15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를 뜻한다.
남북한 및 세계 4강국과 참전국들이 한자리에 앉아 한반도에서의 외국군 철수,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주제로 50여일 동안 소득없는 설전만을 되풀이하다가 합의문 한 장없이 실패로 끝낸 정치회담이다.
짚어둘 일은, 이 회담이 열리게 된 연유다. 1953년 7월27일 조인된 휴전협정은 그 제4조 60항에서 ‘협정 발효 후 3개월내 고위정치회담을 열고 외국군 철수 및 평화적 해결 등을 협의하도록’ 권고했던 것이고, 그뒤 유엔에서의 협정승인 절차와 미·영·불·소 외상들의 합의를 거쳐, 이듬해 4월 제네바 회의 소집이 성사됐던 것이다.
이 회의에 남에서는 변영태 외무장관이, 북에서는 남 일 외상이 참석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정부 최초라고 할 종합적인 통일방안이 이때 변외무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남북한 간에 통일방안을 두고 첫 논쟁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변외무의 ‘한국통일에 관한 14개항’은 6개월내, 유엔감시하, 한국헌법질서에 따른 남북한 자유총선거 의원수의 남북인구비례, 의회 서울 설치 중국군의 총선 전 철수, 유엔군은 점진 철수하되 통일정부 수립 후 완료 등이었고, 북한측은 유엔감시하 총선 거부 총선준비를 위한 남북 동수의 ‘전조선위’ 설치 외국군 6개월내 철수 1년내 쌍방 군대 10만명 이하로 감축 등을 주장했다.
시작부터 실패가 예정됐던 회담이긴 하나, 휴전 성립 후 1년도 안돼서 국제적인 통일논의의 마당이 열렸던 모습은, 그뒤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남북이 비로소 대화의 물꼬를 트고 있는 오늘 되돌아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 전 해 7월27일의 휴전협정 조인식을 보도하면서 “기이한 전투의 중지”라고 썼던 최병우(崔秉宇)기자의 표현대로 제네바회의 역시 ‘기이한’ 통일논의였던 셈이다.
“백주몽과 같은 11분 간의 휴전협정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었다. 학교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측 기자단만 해도 약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을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한번 한국인의 참여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당시 20대 나이였고, 그뒤 금문도해역에서 종군하다가 겨우 34세에 산화한 ‘대기자’ 최병우가 휴전협정조인식을 ‘기이하다’고 본 것은 ‘한국의 운명이 한국인의 참여없이 결정’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사 말미에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곳이 정말 우리나라인가?”라고 묻고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곳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문자답하였다”고 썼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0년, 휴전한 지 47년인 오늘도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여러 신문특집의 결론이다. 20세기 한국언론계를 풍미한 쇼비니스트, 최병우 대기자도 지금 살았다면 생각이 같을 것이다. 그리고 “끝나지 않았다”는 결론은 “이젠 끝내야 한다”는 말과 표리임을 인정할 것이다.
통일의 머나먼 장정(長征)에서 그 초입의 초입에 선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난제의 난제는 ‘우리 내부’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정치인들은 남북화해의 큰 흐름에 이니셔티브를 쥐고도 ‘남남관계’에 고전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해서, ‘열심히 잘못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마음 비운 성찰이 필요한 때다.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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