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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함? 공포? "엽기는 그런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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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함? 공포? "엽기는 그런게 아냐"

입력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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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미녀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채 옆으로 누워 있다.‘이제 만족해라. 그래도 더 보고 싶으면 클릭’.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하나씩 옷이 벗겨진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가면 뿐. 물론 벗기지 말라고, 책임지지 못한다는 유혹적인 멘트가 이어진다.

클릭해 보면. 아 참 기막히게도 썰렁하게 웃고 있는 오지명의 얼굴이 나온다. “엽기다.”

엽기가 판친다

▥ 엽기의 아지트, 인터넷

엽기(獵奇). 기괴한 것이나 이상한 일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쫓아다니는 일 (동아 새국어사전). 단군 이래 ‘엽기’라는 말이 요즘처럼 ‘엽기적’으로 많이, 자주 사용되는 경우도 처음인 것 같다.

유행을 선도하는 인터넷은 엽기의 아지트이다. 엽기 사이트만 수천개가 넘는다.

‘우리 모두 엽기하세’로 분위기를 돋우는 ‘엽기 길드’(승부와는 관계 없이 특별하고 기괴한 전술을 선보이는 스타크래프트 모임), 새우깡을 얹은 초밥, 박카스 영비천 우루사 등을 한 데 섞은 기괴한 건강음료 만들기 등을 소개하는 ‘엽기 메뉴판’, 일본 여성들의 방귀 소리를 MP3 파일로 들려주는 ‘엽기 하우스’, 출산 도중 사망한 태아의 모습이나 잘린 팔, 내장이 튀어 나온 사진들만을 모아 놓은 ‘엽기 사진실’ 등등….

심지어 여고생이 만든 안락사 사이트, 다양한 모양의 똥 실물 사진들을 구비한 사이트, 세상 욕이란 욕을 다 모아 놓은 사이트 등 모든 기괴한 것들이 ‘엽기’라는 한 단어로 축약된다.

2000년 7월의 엽기는 공포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발상의 신선하고 발랄한 전환, 황당한 것, 썰렁한 것, 실험적인 것, 그러나 무언가 와닿는 것이라고나 할까.

▥ 딴지일보와 엽기

엽기가 인터넷을 지배하는 또 다른 문화 장르로 승격한 데는 ‘엽기 딴지일보’의 활약이 크다. ‘한국 농담을 능가하며 B급 오락 영화 수준을 지향하는 초절정 하이코메디 씨니컬 패러디 황색 싸이비 싸이버 루머 저널’을 표방한 딴지일보는 사회 각 분야를 패러디하며 독특한 ‘엽기 보도’로 2,600만 건에 달하는 클릭수를 기록하고 있다.

‘본 기자 열라 놀라…’식의 ‘딴지식 글쓰기’는 인터넷 글쓰기의 새로운 전형이 되고 있다.

딴지일보는 엽기를 ‘변태’가 아닌 ‘패러디, 혹은 유머’의 영역으로 새롭게 진입시켰다는 데 가장 큰 공로가 있다. 엽기는 인터넷을 통해 변태가 아닌 유머의 한 분야로 새롭게 ‘신분 세탁’을 한 것이다.

▥ 엽기의 반전, 코믹함

신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한 하드 고어(피가 흥건한) 스릴러, 오컬트(심령) 소설이나 영화에 이은 또 하나의 유행 문화가 바로 엽기이다.

엽기는 스릴러나 오컬트가 주는 다소의 부담감을 코믹한 분위기로 반전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엽기 일본어’ 사이트는 이를테면 야쿠자가 살해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을 통해 일본어를 배우는 과정이 있다.

도덕적인 부담감 같은 것은 아예 배제된다. 기존의 모든 가치나 도덕은 당연히 전도된다. ‘엽기니까’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가치 체계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미덕은 얼마나 독특한 상상력이냐는 점이다.

상상력이 미덕인 인터넷 문화, 그 문화의 지배자인 신세대들에게 엽기가 인기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엽기는 일본의 오타쿠(열광?) 문화의 한 습성으로 이해하는 평론가들도 적지 않다. 어린이용 캐릭터였던 키티에 집착하는 성인 여성들의 경우처럼 뭔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문화가 결국 ‘엽기’로 발전하게 됐다는 설명인데, 우리의 엽기는 코믹과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르다.

▥ 엽기발랄하다?

‘유쾌한 자극’을 준다는 점은 최근 유행하는 엽기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다. ‘재미’를 최고의 가치로 꼽는 신세대들은 이제 ‘엽기발랄하다’는 말을 최고의 수식어로 즐겨 사용한다. 얼마전까지 ‘쿨하다(멋지다)’는 말이 가졌던 높은 위치이다.

엽기가 엄청난 세포 분열을 하는 데는 이성의 시대가 아닌 감성의 시대가 다가왔다는 점도 큰 이유다.

‘섹스, 똥, 욕’ 처럼 공공 장소에서는 감히 입에 담기조차 민망했던 단어들을 인터넷 상에서 마음껏 사용하면서 ‘용기백배’한 신세대들은 이런 터부의 말을 무한한 상상력으로 변주하면서 일상의 유머로 끌어 들인 것이다.

세상이 많이 바뀐 때문에 이런 도발 역시 다양한 문화의 표현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상이 바뀌면서 말의 쓰임도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엽기’라는 말은 바로 그런 운명을 맞고 있다. 바로 지금.

‘엽기대인’을 시작하며

우리는 지금부터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내공이 일정 갑자 이상에 이른 진정한 엽기대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엽기를 가장한 썰렁한 유머 따위로 강호의 예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아닌, 진정한 엽기 문화의 전달자들. 고답적인 것에 대한 파격, 그 파격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엽기대인들을 통해 만화와 영화, 그림, 가요, 소설, CF 등 우리 문화 현장에서 일고 있는 엽기의 서늘한 바람을 느껴보시길.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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