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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한국경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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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한국경찰인가"

입력
2000.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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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하루였습니다. 다시는 고국에 오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재미동포 사진작가 박모(46·미국 버지니아 거주)씨는 25일 6시간여 동안 겪은 수모와 고초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박씨는 이날 오후 4시30분께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서 카메라 렌즈를 산 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어가다 ‘농산물 수입개방반대’ 시위 현장과 맞닥뜨렸다. 다른 시민들과 함께 농민과 경찰이 뒤엉켜 공방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 돌연 시위대에서 각목을 든 40대 3명이 뛰어나와 박씨에게 달려들었다. 이들은 “너 경찰이지”라며 다짜고짜 각목을 휘둘렀다.

박씨는 온 몸을 구타당하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미국운전면허증과 신분증을 꺼내들고 재미동포임을 알렸으나 이들은 오히려 “카메라는 왜 들고 다녀. 미국에서 왔다면 더 나쁜 놈이야. 다 죽여야 돼”라며 카메라가 든 쇼핑백을 빼앗았다. “바로 앞에 수백명의 진압경찰이 있었지만 본체만체합디다.”

“이러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박씨는 죽을 힘을 다해 이들을 뿌리치고 뛰었다.

지옥같은 현장을 간신히 빠져나온 박씨는 길에서 진압경찰관이 아닌 정복 경찰관을 만나자 반가움에 눈물이 왈칵 솟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들은 경찰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인근 파출소에 가 얘기하라”며 등을 돌렸다. 물어물어 찾아간 서울 종로경찰서 종로3가 파출소 직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일이라면 본서에 가라”는 말뿐이었다.

박씨가 이렇게 해서 종로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께. 그러나 이곳의 얘기는 더욱 기가 찼다. “우리 관할구역을 간발의 차로 벗어나 이곳에서는 사건접수가 안되니 동대문경찰서로 가시오. ”

관할이라고 가르쳐준 동대문경찰서 원남파출소까지 순찰차를 얻어탄 것이 그나마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이제는 됐다”싶었으나 이곳 직원은 “재미동포라 일이 복잡하다. 카메라는 찾기도 어렵다”는 말만 반복했다.

거기다 “사건접수 자체를 재고해 보라”는 직원의 ‘충고’에 박씨는 끝내 참았던 울분이 터져버렸다. “백주대낮에 수백명 경찰이 보는 앞에서 폭행과 절도를 당했는데 그만두라니요. 미국가서 버지니아경찰에 고소하란 말입니까.”

그러자 직원은 할 수 없다는 듯 간단한 조서를 꾸미고 본서에 박씨를 인계했다. 동대문경찰서에서 박씨는 벌써 네번째 똑같은 경위설명을 반복했다. “담당형사가 몹시 귀찮아하면서 피의자 대하듯 하더군요. 심지어 폭행당한 제몸상태를 사진 찍으려던 동료형사를 제지하기까지 했습니다.”

밤 10시나 돼서야 간단한 진술서 한장 작성한 뒤 심신이 기진맥진한 채 지하철에 올라탄 박씨는 승객들의 묘한 눈길에 순간 의아해했다.

와이셔츠 상의 뒷부분이 모두 찢어진 채 등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등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지난 6시간 동안 이것 하나 보아주고 말해준 경관이 아무도 없었다는 생각에 다시 울컥 분노와 서러움이 치밀었다.

2년전 IMF 사태 당시 이민을 떠났다가 친척방문을 위해 지난달 일시 귀국한 박씨는 다음달 10일 출국할 예정이다. “그깟 카메라는 다시 사면 그만입니다. 경제난을 견디다 못해 쫓기듯 떠난 고국이 아쉬워 모처럼 벼르다 왔는데 평생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만 입고 가는군요.”

/강 훈기자 hoon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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