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계 헌병장교 출신인 안토 프룬드지야(31)는 1992~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로 민족간 살륙현장에 서 있었다.그는 부하들이 한 이슬람계 여성을 나체로 심문하고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이를 묵인했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 여성은 수년후 ‘증인 A’라는 이름으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푸룬드지야를 고발했다.
ICTY는 21일 “내가 직접 강간한 게 아니다. 피해 여성은 살아있지 않느냐. 모든 건 전쟁 때문이다”고 항소한 푸룬드지야에게 원심 대로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지난 22일 AP등이 타전한 ICTY의 판결 내용은 국내언론이 놓쳤으나 사흘뒤인 25일 뒤늦게 본보에 의해 ‘단독’확인됐지만 국제법상 아주 중요한 내용 두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강간 행위를 막을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간부가 이를 방조해도 범죄이며, 심신이 불안정한 피해자 증언 만으로도 성폭력 혐의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 판례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한국 등 각국 여성들을 성적노예로 동원한 ‘군대위안부’ 관련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AP통신과 워싱턴 포스트 등은 이 판결을 ‘획기적’ 판례라고 평가했다.
이 판결은 특히 인권이 주권을 앞서는 인권보호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국제사회에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간 뿐만 아니라 대량학살 등 반인륜범은 공소시효나 장소에 상관없이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을 위해 인권을 짓밟고도 퇴임후 국내법의 보호를 받아왔던 독재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보호했던 칠레 정부도 국제 여론이 비등하자 어쩔 수 없이 사법부에 단죄를 맡겨야 했다. 진실은 감춰질 수 없으며 세월이 흘러도 시시비비는 가려질 수 밖에 없다. 역사의 심판은 현재형이다.
이동준국제부기자
dj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