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헌(紫霞軒)을 떠났으니 이제 어디에서 한시를 읊는다?”이병한(67) 서울대 중문과 명예교수가 펴낸 한시(漢詩) 명편들의 선집 두 권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와 ‘이태백이 없으니 누구에게 술을 판다?’(민음사 발행)를 읽으면 이런 안타까운 물음이 떠오를 법하다.
자하헌은 서울대 인문대학 2동 건물 3층에 있는 여남은 평 되는 자그마한 교수합동연구실이다. 합동연구실이라면 교수들이 모여 진지한 학술활동이나 세미나를 여는 장소로 짐작되지만, 사실은 그들이 틈나는 대로 들러 차를 마시거나 한담을 나누거나 바둑을 두는 휴게실 같은 장소였다.
이교수는 2년 전 교수직을 정년퇴임했다. ‘치자꽃 향기…’와 ‘이태백이 없으니…’는 이교수가 1992년 2월부터 퇴임하기까지 이 자하헌 한 귀퉁이에 놓여있는 화이트보드에 한 수 한 수 적어 소개한 한시의 모음이다.
책에서는 이때 소개된 당송(唐宋) 시대 이백 두보 백거이를 비롯해 소식 구양수에 이어 명청(明淸)대의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180수의 한시를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편집했다.
그러나 막상 소개된 한시 시편과 이교수의 해설 그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한시 강의를 둘러싸고 벌어진 교수들의 에피소드다.
이교수는 그날그날 소개한 한시와 그것을 놓고 자하헌에서 있었던 자그마한 이야기들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고, 이번 책에서 ‘산창한담(山窓閑談)’이란 이름을 붙여 이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있다.
영문과 이병건 교수는 이병한 교수의 한시 강의에 조교 역할을 자청, 자전을 뒤져 어려운 한자의 뜻을 찾아내고 때로는 이병한 교수가 메모해 주는 뜻풀이를 자하헌에 모인 교수들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국문과 조동일 교수는 외사씨(外史氏)라는 별칭으로 자주 이교수가 적어놓은 한시를 패러디해 자신의 생각을 담은 한시를 짓기도 했다.
중진 시인인 영문과 황동규 교수는 이교수를 자신의 ‘시학 선생’으로 모시고 당송시대 한시의 깊이를 새로 깨치는 가장 진지한 학생이 됐다.
이들 외에도 이상옥, 심재기, 안삼환, 안병희 교수등 20여명의 ‘자하헌 패거리’들은 이교수의 한시 강의에 매료돼 때로는 시국을 비판하면서, 때로는 바둑 훈수로 흰소리를 하면서 자하헌에서 망중한을 보냈다.
이상옥 교수는 책 말미에 쓴 발문에서 “20세기 말엽 인문대학의 어문계 교수들을 둘러싸고 있던 지적 분위기를 여실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이교수가 청대 옹조(翁照)의 시 ‘달밤(梅花塢坐月·매화오좌월)’을 칠판에 써놓았다.
‘달 밝은 밤 조용히 앉아/ 홀로 읊조리는 소리에 서늘함이 출렁이네/ 개울 건너 늙은 학이 찾아와/ 매화꽃 그늘을 밟아 부수네’. 학이 성큼성큼 내딛는 발에 매화 그림자가 부서진다는 감각적 표현이다.
조동일 교수는 이 시 옆에 ‘靜坐混世中(정좌혼세중) 孤吟憂國詩(고음우국시) 隔海洋夷來(격해양이래) 답파근화성(踏破槿花城)’란 자작시를 적었다. 풀이하면 ‘혼탁한 세상 복판에 앉아/ 외로이 우국시를 읊노니/ 바다 건어 서양 오랑캐 건너와/ 무궁화 성역을 밟아 부수네’. 1998년 1월13일 IMF 와중의 일이었다.
조교 이병건 교수는 이교수의 정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한다. “이제 정년하면 어디에다 시를 쓰지? 전철 운임이 공짜이니 전철 타고 다니면서 한시 강의나 할까”. 이병한 교수는 “한시가 있는 지하철, 재미있는 풍경”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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