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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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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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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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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정치회담의 배경과 실패과정한국전 휴전 이후 한반도 통일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회의 개최는 휴전협정 제4조 60항에 규정되어 있다.

이 조항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내에 대표를 파견하여 고위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로부터 외국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권고했다. 1953년 8월28일 개최된 유엔총회는 휴전협정을 승인함과 동시에 정치회담의 개최를 환영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정치회담의 당사자는 유엔측에서 대한민국과 참전 16개국을, 공산측에서 북한과 중국 그리고 이들이 원한다면 소련이 참가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1954년 1월25일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베를린에서 개최된 ‘4대국 외상회담’에서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을 4월26일부터 제네바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4월26일부터 6월15일까지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이 개최됐다.

이 회의는 한반도통일에 대해 주요 강대국이 남북한과 더불어 토의한 첫 번째 회담이었고, 한국이 주권국가로서 처음으로 참여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국제회의라고 할 수 있다. 참여국들은 각기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 회의에 참가한 어느 국가도 이 회의에서 한반도 통일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한국측은 이 회의 참가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유엔이 침략자로 규정한 공산국가들과 회담을 하게 되면 공산측의 입지만 강화될뿐더러 전쟁 이후 중국군이 북한에 주둔하게 되면 북한이 중국으로 통합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이러한 회의적 태도를 보인 한국은 결국 회담 개최 8일 전에야 공식적으로 참석을 수락했다.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한국정부의 입장은 유엔이 제시했던 총선거를 이미 남한지역에서 실시하였기 때문에 북한지역에서만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이를 거부하고 유엔 참전국들은 한국정부에 한국 전체의 총선거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이 회담에 한국측 대표로 참석한 변영태 외무장관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5월22일 한국통일에 관한 14개 조항의 종합적 제안을 했다.

이 제의의 골자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 6개월 이내에 유엔감시하에 한국 헌법질서에 따라 비밀·보통투표에 의해 남북한을 통한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전(全) 한국의회의 의원 수는 남북인구에 비례하도록 하고, 총선후 전 한국의회는 서울에서 개최하며 중국군은 선거실시 1개월 전에 철수를 완료하고 유엔군은 선거 전에 점진적인 철수를 시작해 통일정부가 전 한국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달성하고 이를 유엔이 확인할 때 완료할 것이며 통일·독립된 민주한국의 권위와 독립은 유엔이 보장할 것 등이었다.

공산측은 4월27일부터 6월15일까지 유엔을 배제한 총선거를 제의했다. 북한의 남일 외상은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거부하고 전 조선 국회를 위한 총선거 실시의 준비를 위해 남북 동수 대표로 구성되는 ‘전 조선 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주둔 외국군대는 6개월 이내에 모두 철수하며 1년 이내에 쌍방 군대를 10만명 이하로 감축하자고 주장했다.

참전 16개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문제 해결에 있어서 유엔의 권능과 감시하에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선거의 실시를 재확인했다. 참전국들은 한국문제에 대한 책임을 유엔으로 다시 회부시켰고, 한국에서의 유엔의 역할 및 목적에 대해 지지하는 것을 재확인했다. 결국 제네바회담은 50여일간의 설전 끝에 공동합의문 없이 종료되었다.

■한국전 종식방안과 평화체제 구상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휴전이기 때문에 중단된 상태이고, 실제로도 휴전 당시의 대립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1954년 제네바회의를 통해 남북한의 통일을 국제적인 차원에서 모색하였지만 동서 양진영의 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였고, 전쟁 당시의 적대감이 전혀 해소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네바 정치회담 실패 이후 남북한의 상호 적개심과 불신감은 증폭되었고, 대화와 협상에 의한 평화와 통일의 모색보다는 정권안보와 군비경쟁에 국력을 집중시켰다. 한국전쟁은 무력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남겼지만, 남북한의 군사적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종료후 북한은 분단을 인정하지 않고 남한정부를 ‘미제의 괴뢰정부’로 지칭하며 혁명전략을 통해 적화통일을 추구했다. 북한은 대내적으로 군사우위 노선과 중공업 우선정책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 반미민족주의 노선을, 남한에 대해서는 민족민주전선을, 제3세계에 대해서는 반미통일전선을 구축했다.

반면 한국은 강경한 반공노선을 지향하면서, 수출주도산업을 육성시켜 신흥공업국가로 부상하면서 경제 등 전체 국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선 경제건설 후 통일’이라는 슬로건 하에 국가건설에 매진한 것이다. 이후 한국은 전체 국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여 안보체제, 특히 미국과의 안보협력 체제를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북한의 군사우위 노선과 한국의 안보체제 강화는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와 통일의 모색보다는 군비경쟁을 가속화해 남북한은 과잉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과중한 군사비 부담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었고, 특히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모순점 때문에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남한은 북한과 대립하고 있다는 안보논리에 의하여 20년 이상의 군부통치가 이루어지면서 인권 및 민주발전이 더디게 되었다.

1980년대에도 한반도는 분단상태에서 극한적인 대치를 지속해 왔다. 물론 1990년대 들어 남북한간에는 정치적 신뢰구축을 포함한 관계개선 노력의 한 발자취를 남기기도 하였다. 1990년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여, 1991년말 ‘남북간 화해,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1993년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에 따른 핵무기 개발의혹과 팀스피리트훈련에 대한 북한의 비난으로 기본합의서는 사문화되었으나, 이 문서는 남북한이 신뢰를 구축하고 교류·협력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냉전대립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틀은 마련했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남북한 당국자 및 주민들의 인식 전환이다. 상대방의 위기나 불행이 자신의 기회와 행복이라는 인식과 자신의 이익을 상대방에 강요하거나 굴복시키는 것과 같은 제로섬(zero-sum)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이익도 존중하면서 상호이익을 최대화하는 포지티브섬(positive-sum)적 접근방식을 택해야 한다.

한국전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북한은 미·북평화협정의 체결을 주장하고 있으나, 한국과 미국은 평화협정의 당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자 회담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개최된 4자 회담에 대한 회의론도 많고 진전속도는 느리지만 남북한만의 쌍무협상이 아니라 다자적 협상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목표로 하는 참여국들의 이익이 합치하게 되면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의 체결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이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체결하는 협정에는 불가침협정 또는 평화협정을 고려할 수 있다. 불가침협정은 평시에 전쟁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국가간에 체결하는 협정이고, 평화협정은 전쟁을 사후에 정리하기 위해 종료되지 않은 전시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기 위한 협정이다.

한국전쟁이 아직 법적·제도적으로 종식되지 않은 상태이고,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는 불가침협정과 평화협정 모두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남북한은 기본합의서에 불가침 내용을 포함시켰으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법적·제도적으로 평화체제를 이루게 된다. 평화협정의 내용은 한국전의 종결선언과 남북한의 상호불가침 및 우호관계의 회복, 주변국의 평화보장, 평화유지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 우발사태시 당사국간의 협의 및 국제협조, 협정위반 국가에 대한 국제제재 조치 강구, 해당국의 군비배치 전환 및 군축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에 대한 교차승인이 이루어지고,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한반도가 안보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안정단계에 들어서면 남북한은 남북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를 가동하여 이를 중심으로 남북한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올 6월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에는 해빙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6월 15일 공동선언문의 처음 두개 항이 통일에 관한 것들이고, 이 내용은 통일방식까지 거론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 통일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다.

우선 남북한간의 적대관계 해소 방안이 구체적이고 단계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이고, 대외적으로 주변 4강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평화체제의 구축은 어려워지고 다시 적대관계로 돌아갈 가능성도 존재하고 있다.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보여 준 우호적인 그리고 동포애적인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 남북한 평화와 통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평가된다.

김계동(한국전쟁연구회 총무이사) gyedong@netsgo.com

입력시간 2000/07/2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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