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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이산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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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이산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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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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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 변호사-이지연 방송인■ 이재운(李在運) 변호사

1937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51년 양정중 2년 중퇴, 1962년 동아대 법학과 졸업. 1958년 10회 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혁명검찰부 검찰관, 서울·대전·대구지검 검사를 역임했고 1972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북5도연합회의장, 황해도민회장을 지냈고 현재 일천만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1991년엔 목사안수를 받았고 현재 여의도 영신교회 부목사로 있다.

■ 이지연(李知娟) 방송인

1948년 전북 익산 출생. 1969년 중앙대 방송학과 졸업, 그 해 기독교방송에 입사했다. 1980년 프리랜서를 선언, KBS ‘스튜디오 830’등을 진행했다.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진행해 그 해 국민포장을 받았다.

1975년(기독교방송 ‘할머니 안녕’) 1985년(KBS ‘스튜디오 830’) 두차례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KBS 1TV ‘언제나 청춘’등을 진행하고 있다.

전쟁1세대 모두 돌아가시기 전 이산가족문제 획기적 안 있어야

북에 이산가족을 둔 남한 국민은 767만명(1996년 통일부 추정).

역사적인 6·15선언 두달만인 8월15일, 드디어 1985년에 이어 두번째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

1985년 전쟁후 첫 공식 이산가족 상봉을 했던 이재운 변호사와 2000년 8월15일 상봉명단에 오른 방송인 이지연씨가 만났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 현장이었던 여의도공원에서 두 사람은 만남의 아픔과 설렘을 이야기했다.

- 두 분이 구면이시지요.

▲이재운 = 예. 1983년 제가 황해도민회장일때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시작됐었는데 방송에서 이산가족이 만나면 호적정리를 도민회에서 해줬습니다. 그때 MC였던 이여사를 알게 됐지요.

▲이지연 = 10년만에 뵙네요. 그동안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많이 좋아지신 것같아요(이변호사는 5년전 중풍으로 변호사 일을 그만뒀다).

- 두 분 모두 이산가족이신데요. 이변호사님은 15년전 가족을 만나셨지요.

▲이재운 = 저는 7남매 중 외아들인데 전쟁 때 서울(양정중)에 유학하고 있었지요. 무학인 아버지가 “넌 꼭 서울대에 보내마”라며 서울에 보낸 것이 그대로 이별이 됐습니다.

정말 혈혈단신, 고학으로 공부하느라 구두닦이 등 안해본 것이 없습니다. 1985년 9월21일 평양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니가 어떻게 변호사가 됐느냐”며 우셨습니다. 당시 평양가는 버스에서 가족을 못만날 지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정말 사진 한 장, 선물 하나도 안 갖고 갔습니다.

별실에서 30분동안 아버지와 따로 만났지만 흥분해서 주소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지요. 그동안 소식 한 자 못듣다가 2년전 옌지(延吉)의 동포를 통해 아버지가 그 해 돌아가셨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사진 한 장 주고 받지 못했는데…. 가슴이 꺼지데요. 상봉 후에는 세상살 맛이 안납디다. 아버지가 어렵더라도 가족들과 모두 월남했더라면 이렇게 헤어져 살 지도 않았을 것을. 게다가 아버지는 북한 자랑만 합디다. 서글펐지요.

신앙이 없었다면 패배감을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아예 다음해 신학교에 입학해 4년만에 목사안수를 받았지요.

▲이지연 = 그랬군요. 저는 1983년 138일동안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진행했는데 한번은 16시간 35분동안 쉬지않고 MC를 보기도 했었어요.

졸음보다 힘들었던 것은 다른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면서 정작 내 가족은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방송 마지막 날 마지막 코멘트에서 용기를 내어 대본에 없던 애드리브를 했어요. “방송은 끝나지만 이산가족 찾기는 계속 될 것입니다. 저도 이산가족입니다”라구요.

▲이재운 = 이여사가 이산가족인 줄은 몰랐는데 신문을 보니 북한에 오빠가 계시더군요.

▲이지연 = 네. 그동안 오빠가 행방불명됐다고 이야기해왔는데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꼭 복권에 당첨돼 큰 돈을 번 것같아요.

6남매중 외아들인 제 오빠는 고3때 의용군에 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일본으로 간 뒤 편지를 보내왔어요.

“이 곳에서 공부하고 싶다”며 막내인 제 안부를 물어왔다고 해요. 편지가 온 후 특무대 군인이 얼마간 우리 집에 상주했던 걸 기억해요.

1970년대 말까지도 경찰이 매주 1~2회 집으로 찾아왔었지요. 어린 마음에 “혹시 오빠가 오면 신고해야 하나”를 고민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고민 시간이 길어지더군요.

월북자 가족이란 딱지때문에 방송사에 들어갈 때도 신원조회가 까다로웠지요. 이런 사정때문에 나중에 중국을 통해서라도 소식을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 오빠에게 피해가 갈까봐요. 이번에 적십자사에 가서 흰 머리의 오빠 사진을 보는 순간 울컥하며 반가운 반면 원망도 생기더라구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싶어하셨는데….

▲이재운 = 늦었지만 오빠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해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실 1992년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100여명의 명단을 뽑아둔 적이 있어요, 결국 성사는 되지 못했지만.

올해 이 명단에 있던 분들의 생사를 확인해 보니 8년동안 73명이 돌아가셨더라구요. 이산가족문제는 앞으로 10년안에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 1세대는 다 돌아가십니다.

제가 아버지를 만났을때 조카와 만난 한 분이 “니가 내 조카인 증거를 대라”며 마치 경찰관 심문하는 것같은 상봉을 하시더라구요. 부모 자식간이 아니면 만남의 절실함이 없어집니다.

▲이지연 = 맞아요. 제가 독일 유학중인 둘째딸에게 “삼촌이 살아계신대”했더니 “엄마, 좋으시겠어요”라더군요.

저는 걔가 울 줄 알았는데, 세대가 다르니 반응도 그렇게 다르더군요. 현재 남한의 전쟁 1세대가 123만명이라는데 이들이 앙금을 풀고 만남을 이을 수 있는 끈입니다.

돌아가시기전에 다 만나려면 몇년에 한 번씩 찔끔찔끔 만날 게 아니라 획기적인 안이 필요할텐데요.

▲이재운 = 이미 1975년 남북회담에서 사람찾기_서신교환_상설면회소 설치_교환방문_결합·정착의 순으로 이산가족 의제가 채택됐었어요.

올 9월에 적십자 본회담이 열리면 상설면회소 설치까지는 합의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절망스런 상황은 아니지요.

1976년 독일이 우편교환협정을 맺어 편지와 함께 소포도 보내게 했는데 이번에 대통령께서 꼭 서신교환협정도 맺어주셔서 북의 가족들에게 뭔가 보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 북한에 제일 필요한 것이 의약품입니다. 제 누이 둘도 폐결핵으로 죽었답니다.

▲이지연 = 아직 상봉가족 추첨이 안돼 오빠를 만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만일 만난다면 어떻게 하고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까요.

▲이재운 = 우선 흥분하지 말아야 해요. 저는 36년만에 아버님 얼굴을 뵈니 그냥 흥분해서 “누이, 살아있소”라고만 묻고 주소도 못 여쭤봤어요.

나중에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해서 후회가 됩디다. 만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남한 가족 소식을 전해주고 북한 가족 소식을 찬찬히 물어보게 미리 정리를 해가면 좋을 겁니다.

‘잘사느냐, 하루 몇끼 먹느냐’는 말이나 정치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고 ‘제사날짜, 부모님 묘소위치, 주소’ 등 가족들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아요.

가족사진이나 의약품·아이들옷 등 선물 등도 준비해가면 좋을 겁니다. 만난 후에는 서로 헐뜯지 않아야 해요.

1985년 북한 갔다와서 ‘못산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는데 이게 역효과를 불렀어요. 그때 평양가서 호텔 소지품을 함부로 다룬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것도 실수였죠.

- 이산가족이 만난 후에 경제적 사정이나 문화적 차이때문에 후유증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던데요.

▲이지연 = 1983년에 만났던 이산가족중에 영화 ‘길소뜸’처럼 후유증이 생긴 경우가 있다고 해요. 당시 방송 진행중에도 만남 성사 직전에 전화를 끊거나 자취를 감추는 경우를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콩 한 쪽도 나눠먹는게 우리 인지상정아닌가요. 후유증이 무서워서 만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같아요.

▲이재운 = 6·25때 20대 전후의 나이로 월남한 사람들은 고향에서 조혼했다가 이를 숨기고 다시 결혼한 경우가 있지요.

5만~10만명이라고 추정되는데 남한 가정이 깨질까봐 상봉신청도 못하고 방황합니다. 제 주위에도 일곱이나 있는데 가족몰래 북한 가족과 편지왕래를 하고서도 정작 만남은 주저하지요.

이제는 남한의 가족이 이해하고 북의 가족을 도와주어야 할 때입니다. 정작 문제는 남북 가족이 만난 후에 함께 살게 될 경우입니다.

하지만 두 중국이 양안문제로 험악할 때도 이산가족의 결합은 안정적으로 이루어진 사례를 보면 남북 당국의 의지가 굳다면 가능할 때가 오겠지요.

15살때 월남한 저는 이산세대의 막내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산가족 만남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이 마지막 남은 소망입니다.

노향란기자 ranh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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