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 유배되어 살던 곳, 강원도 영월군 광천리. 서강을 건너서 유배지 청령포를 보고 돌아 나오며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이 고여 흐르듯 그렇게 가슴속에서 빗물이 흘렀다. 나무와 강과 구름과 바람만이 흔들리며 지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사람을 그리워하며 멀리 한양을 향해 단종이 늘상 걸터 앉았다던 관음송(觀音松)은 이제 늙은이의 모습으로 600년이란 세월을 보듬어 안고 힘겹게 서 있었다.외지인도 유배지의 출입이 금지되었지만 단종의 행동반경이 동서 300척, 남북 490척 이내로 엄명이 내려 있었다니 그 잔인함에 강물까지 처연히 가슴을 적시는 듯하였다. 왕자에서‘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짐승들만 노니는 고적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무섭고 고독했으랴. 인간에게 고독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단종이 거처하던 어가와 망향탑을 돌아보며 주변의 초록 풀 사이로 빨갛게 농익은 산딸기가 숨어있어 거니는 곳마다 눈에 띄었다. 시인이라면 몇 편의 시로 표현도 해볼 수 있으련만 가슴속에 그 아픔을 묻고 오니 며칠이 지나도록 그 그늘은 짙게 드리워져 가실 줄 모른다.
역사는 그 속에 묻혀 우리의 뇌리속에서 사라져 가지만 그 흔적은 현실로 남아 오늘날까지 가슴을 울리니 빨간 딸기만큼이나 생경스러워 다시 입 속에 넣어 우물거리듯 문득 역사를 곱씹어 본다. 현실의 또 다른 잘못된 역사가 어느 누구를 유배지로 보낼 것인지, 그런 아픔은 이제 되풀이되지 말아야 후손들에게 가슴 아픔을 주지 않을 터인데. 혼자 생각하며 유배지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돌무덤 앞에서 그렇게 기원해 보며 정성껏 돌 하나를 얹어 놓았다.
천 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맘 같아야 울어 밤길 놓아라
사약을 갖고 왔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유배지에 두고 나오며 그 강가에 앉아 눈물로 썼던 시이다. 나는 그 강물에 손을 적셔보고 단종을 다시 그곳에 모셔놓고 왔지만 그는 언제나 누구의 가슴 속으로 출장을 올지 모른다. 역사를 오염시키지 말도록 그는 그 가슴속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정옥·서울 강서구 화곡8동
독자에세이에 원고가 실린 분께는 문화상품권을 드립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