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물판정 시스템과 실효성법원과 검찰 등 사법기관의 음란물 판정은 ‘건전한 성풍속과 청소년 보호’라는 사회적 법익, 헌법이 보장한 ‘표현과 학문·예술의 자유’라는 개인의 권리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논란의 핵심은 실정법상의 사회적 규범을 보호하기 위해 사법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느냐에 모아져왔고, 지금까지 법원과 검찰은 대체로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협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려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제수준 향상과 다양한 대중문화의 범람, 그리고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수용능력이 커지면서 사법기관의 음란물 판정도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검찰이 영화 ‘거짓말’에 대해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이 영화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무혐의 처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의 이같은 유연한 태도 변화를 두고 “이는 사법기관이 더이상 음란물 판단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음란성 시비에 휘말린 작품에 대한 사법기관의 판단이 사회적 관심이 수그러든 후에나 내려짐으로써 사회구성원의 행동에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사전검열제가 없는 현실에서 음란물을 사후통제해야 하는 당위성은 인정되지만 범죄예방이나 예측가능성 측면에서는 창작 음란물에 대한 처벌이 실효성을 상실한 감이 있다”고 인정했다.
특히 인터넷 등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음란물의 실시간 전파가 보편화한 사회환경을 감안할 때 음란물에 대한 유죄판정은 ‘창작활동에 대한 사후징벌’에 불과하며,‘창작물의 수용자를 보호한다’는 공익성은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실효성을 상실한 사법기관의 음란물 판정 대신 자연스런 시장기능과 수용자의 선택을 통해 음란물이 자연도태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최재천(37)변호사는 “1980년대 이후 구미에서는 개인 내면의 자유, 윤리, 도덕 등에 대해서는 형법을 통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불개입주의’가 법이론으로 정립됐다”며 “성숙해진 사회여건을 감안, 음란물 판정을 시장질서에 맡겨 수용자들의 선택에 의해 음란물이 자연 도태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손석민기자 hermes@hk.co.kr
■해외 음란물관련 판례와 변화
미국 연방대법원도 1950년대까지는 음란물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1957년 ‘로스(Roth) 대 미합중국 사건’에서 “출판업자 로스의 외설출판물 유포 행위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판결한 것이 좋은 예다. 대법원은 당시 “호색적 표현이 명백해 사회의 평균적 윤리를 저해할 정도의 음란한 표현은 헌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고 밝혔다.
법원의 엄격함이 누그러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것이 1966년 ‘파니 힐(Fanny Hill)’이라는 성애소설을 쓴 작가 메모어(Memoir)에 대한 무죄판결로, 이때 음란물 판단의 세가지 기준이 제시됐다.
연방대법원은 “작품의 음란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호색적 흥미에 대한 호소 공동체 기준을 위배할 정도의 공격성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작품이라는 점을 모두 입증해야 한다”고 밝혔다.
검사가 어떤 작품의‘사회적 무가치성’을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결론적으로 섣부른 음란물 판정에 연방대법원이 제동을 건 셈이다.
미국의 음란물 판단기준은 1973년 음란광고지를 돌린 혐의로 기소된 성인잡지 판매업자 밀러(Miller)에 대한 사건에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쪽으로 좀더 구체화했다.
‘명백히 공격적인 성행위’의 예를 구체적으로 제시,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위축되는 것을 방지했고 ‘주제가 있는 음란’이라는 개념을 도입,“작품의 음란성은 전체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결국 음란물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대체로 음란물 판단의 기준을 구체화하고 표현의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음란물 논란 변천사
이현세씨의 만화‘천국의 신화’에 대한 법원의 유죄판결이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음란성 여부가 문제될 때마다‘음란성’의 범위와 한계점을 놓고 논쟁이 거듭됐지만 음란성에 대한 판단기준은 사회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
현재‘음란성’또는‘음란물’에 대한 법원 판례는‘성욕을 자극해 흥분시키는 동시에 일반인의 정상적인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음란성을 해석하는 용어들이 추상적이어서 사법기관의 판단도 일정치 않았다.
60,70년대, “명화(名畵)도 음란물 될 수 있다”
법정에서 처음 다뤄진 음란성 시비는 1969년‘유엔성냥 사건’. 당시 유엔화학공업사 대표 신상철씨는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나체의 마야’를 성냥갑에 인쇄해 판매, 음화제조 및 판매죄로 기소됐다.
여성의 나체 그림이 인쇄된 유엔성냥이 불티나게 팔렸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명화라도 불순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음란물이 될 수 있다”며 유죄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긴 했지만 소설‘반노’의 작가 염재만씨가 70년 음란문서제조죄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당시에도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일었다.
당시 1심 법원은 ‘…서로의 국부가 교면스러운 빛을 발산하면서 한껏 부조되고 그 위에 온갖 충격이 요동쳐 갑니다”는 등의 표현을 문제삼았다.
90년대, “문학도 무한정 표현의 자유 누릴 수 없다”
90년대 급속한 성개방화는 검찰과 법원의 엄격한 판단을 초래했다. 검찰은 92년 소설‘즐거운 사라’의 마광수 교수, 95년 연극‘미란다’의 연출자 최명효씨, 97년 소설‘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장정일씨를 기소했다.
대법원은 95년 “문학작품이라고 해서 무한정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며 마 교수에게 징역8월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
비슷한 취지로 1,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장씨는 상고심이 진행중이다. 검찰은 97년 만화‘천국의 신화’작가 이현세씨를 벌금 300만원에 약식기소했고, 지난해 탤런트 서갑숙씨의‘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의 음란성 여부를 내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법기관의 음란성 판단기준도 시대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일례로 영화‘거짓말’을 검찰이 무혐의 처리한 것은 과거 검찰이 이 영화 원작소설의 작가 장정일씨를 기소, 법원이 징역10월 선고와 함께 법정구속까지 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이다.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최종 판단은 법이 아니라 시장과 소비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검찰 간부의 말은 이같은 변화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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