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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34) 이윤기 단편소설 '세 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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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34) 이윤기 단편소설 '세 동무'

입력
2000.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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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죽(海藏竹)이란 대나무가 있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바다를 품은 대나무다. 바다를 품었지만 이 대나무는 산에서 사는 산대나무다.‘사방에서 비 오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하늘은 청명한데 웬 봄비소린가 싶어진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물이 가까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웬 소린가 싶어진다’.

소설가 이윤기(53)씨의 단편 ‘세 동무’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해장죽 소리를 들으러 광주 무등산 깊은 자락에 위치한 원효사(元曉寺)를 찾았다. 이씨로서는 십오년 만에 찾아가는 길이다.

‘절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고 이씨는 ‘세 동무’의 첫머리에서 썼다. ‘절이 우리 마음 속에 차지하고 있는, 적당하게 허무하고 알맞게 고즈넉한 자리 때문인가?’라고 그는 자문자답했다.

그의 말처럼 절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한 대처를 넉넉하게 보듬고 있는 무등산, 오동나무 배롱나무가 빽빽하고 능소화가 군데군데 피어있는 잣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이 길을 올라 ‘세 동무’의 주인공은 폐사지(廢寺址)에 세워진 산중의 암자 약수암(若水庵)을 찾아갔다.

그는 아내와 사별한 중년 남자다. 아직 중음(中陰)을 떠도는 아내의 혼을 달랠 49재를 치르기 전이다. 약수암의 주지는 비구니 스님 ‘자연’이다. 사내의 젊은 시절 친구의 여동생이다.

여고 1학년 때 이후 처음 보는 사내를 자연 스님은 스스럼 없이 ‘오빠’라 부른다. 자연 스님과 다른 비구니 둘만이 거처하는 이 암자에서 사내는 또 한 동무를 만나게 된다.

그 동무는 자연과 친구로 지내는 수녀 ‘민지’였다. 산중의 비구니 암자에서 만난 수녀. ‘(그는) 눈을 의심하고 본 것을 의심한다… 진흑(眞黑)과 진백(眞白)의 경계가 뚜렷한 수녀복은 잿빛 산밭에서 유난히 튄다.

새싹이 아직 푸르름을 지어내지 못하는 산밭에는 세 가지 색깔이 혼재한다. 수녀복의 진흑과 진백, 그리고 비구니 장삼의 담묵빛 회색이 혼재한다’.

아내와 막 사별한 사내와 비구니와 수녀. 이들은 세 동무가 된다. 그 매개는 해장죽 소리와 70년 전 일제시대 무성영화의 주제가로 쓰였던, 고복수가 부른 ‘세 동무’라는 노래다.

‘장미 같은 네 마음에 가시가 돋쳐/ 이다지도 어린 넋이 시들어졌네/ 사랑과 굳은 맹세 사라진 자취/ 두 번 다시 피지 못할 고운 네 모양’. 3절까지 이어지는 노래 ‘세 동무’를 사내는 거듭 불러주고 자연과 민지는 절집 요사채 방바닥에 엎드려 가사를 받아쓰고.

이 짤막한 단편으로 이씨는 소설이 줄 수 있는 정서적 체험의 어떤 극한을 보여주는 듯하다. 평론가 황종연씨의 말처럼 “자기보존의 욕망이 지배하는 일상이 정지되고, 생에 대한 비범한 직관이 일어나는 특별한 정황”을 이씨는 그만의 개성 넘치는 문체로, 격조있게 그려냈다.

‘세 동무’의 주인공은 소설의 끝머리에 산을 내려오면서 “사람 사는 데가 참 슬프게 아름다운 곳”이라고 깨닫는다. 이 소설을 읽고 난 독자의 감회도 꼭 그와 같은 것이다.

이 단편을 쓰면서 이윤기씨가 배경으로 염두에 두었던 절이 바로 원효사였다. 십오 년 전 찾아왔을 때는 소설 속에 묘사된대로 기역자 본채와 요사채 두칸짜리 맞배지붕 기와집 두 채밖에 없던 것이, 이제는 불사로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해장죽은 여전했다. “살아있을 때는 바다를 감추고 있다가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 파도치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를 지어내던 산대나무 해장죽이 죽어서는 폭죽소리를 낸다… 해장죽 마디 터지는 소리는, 상선사지 약수암에 속하던 해장죽을 우주에 편입시키는 소리인가”라고 이씨가 묘사했던 해장죽이다.

“저희들도 댓잎, 낙엽 부딪는 소리를 빗줄기가 후두둑거리는 소리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이구, 바깥에 장삼 말리려 내놨는데 들여야겠다’고 놀라다가도, 문득 그것이 빗소리가 아니라 해장죽 소리임을 깨닫지요.”

원효사 주지 현지(玄旨·49) 스님은 이씨와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녹차를 내왔다. 스님은 요사에서 코끼리 형상을 한 모습으로 한 눈에 내다보이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밤에는 바람이 저 계곡을 좍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소나기 소리, 파도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지민 스님, 지승 스님을 아시는지요.”

“아다마다요, 제가 이 절에 온 지는 삼년여밖에 안됐지만 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지승 스님은 이윤기씨가 28년 전 월남전에서 만난 친구 사이의 스님이라고 했다. 지민 스님은 이씨가 원효사를 찾았을 당시의 주지 스님. 그가 바로 이씨에게 해장죽의 존재를 가르켜준 스님이다.

이씨는 현지 스님에게 “원효사를 들렀다가 얼마 후 지민 스님이 입적, 송광사에서 있었던 다비장에서 그분을 떠나보내었다”고 말했다.

그는 “스님 스님, 시방세계가 불바다요, 나오시오”하는 다비식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해장죽은 여전했지만 ‘세 동무’에서 민지 수녀가 해장죽을 군불로 땔 때 ‘마디 터지는 소리’가 나던, 아궁이는 없어졌다.

보일러로 다 교체한 때문이다. ‘잘 마른 해장죽은 불쏘시개도 필요하지 않다. 잔가지에 당긴 불은 순식간에 아궁이 하나 번진다.

요사채 추녀가 환해진다. 탁, 탁, 타닥, 탁… 아궁이 속은 숫제 작은 폭죽놀이판이 된다’고 이씨가 묘사했던 아궁이 말이다.

이씨는 “여름 대소리보다는 겨울 시누대 소리가 더 강하지요. 여름 대는 생명이 살아있어 부드럽다면 겨울 대는 생명을 그 안에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현지 스님은 “이즈음은 나무 해서 불 땔 수도 없지요. 부처님 말씀이 ‘나무 벨 때 10년만 되도 고(告)하라’고 하셨는데, 함부로 나무 벨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입니다”라고 받는다.

원효사는 조계종 21교구 송광사의 말사다. 광주 시내에서 12㎞ 정도.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이 절 역시 수 차례 불타고 중창됐다. 6·25 당시 불타버린 자리에 지금의 절 모습이 들어선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세 동무’의 약수암이 폐사지에 들어선 것과 흡사하다.

‘세 동무’가 실려있는 이씨의 소설집 ‘두물머리’(민음사 발행)의 12편 소설 중 6편이 절과 관련있는 이야기다. “신학교를 나왔다는 자가 절 이야기 많이 쓰고, 경상도 출신이라는 자가 전라도 친구 많다고 뒷말도 많이 듣는다”고 이씨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광주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곳에서 공사판 일, 속어로 노가다 십장을 하기도 했다.

발간된 지 한 달 여 된 그의 ‘두물머리’는 이씨의 문학이 아름답게 꽃핀 근래 드문 우리 소설의 성취로 꼽힌다. 매편이 고르게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유장한 정신의 힘을 보여준다.

“요즘 친구들끼리의 술자리에서는 ‘세 동무’가 주제가지요”라며 이씨는 한 잔 술에 얼큰한 목소리로 ‘세 동무’를 구성지게 불렀다.

‘장미 같은 네 마음에 가시가 돋쳐 이다지도 어린 넋이 시들어졌네…’

이씨는 노래를 부르면서 ‘세 동무’ 창작의 숨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에 친구인 김영석 시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요. ‘세 동무’의 사내와 비구니, 수녀의 이야기는 그대로 실화입니다. 배경만 원효사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여름 시누대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를 뒤로 하고 산사를 내려오는 길은 ‘세 동무’의 1절 가사 ‘서녘 하늘 해 지고 날은 저물어 나그네의 갈 길이 아득하여요’처럼 아득한 길이었다.

▥약력

·1947년 경북 군위 출생

·성결교신학대 졸업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입선

·소설집 ‘나비넥타이’(1998년) ‘두물머리’(2000년), 장편 ‘햇빛과 달빛’ (1997년) 등 외에 다수의 번역서

·1998년 제29회 단편 ‘숨은 그림 찾기 1’로 동인문학상 수상

하종오기자

joha@hk.co.kr

■이윤기씨는 “문학은 언어를 곧추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소설은 이러저러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생각할 거리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의 말도 덧붙였다.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먼 길을 돌아온 작가다. 고교 입학 3개월 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그는 책만 읽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나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하이쿠(俳句)를 읽기 위해 일본어를 독학했다. “문학은 청산가리“라고 되뇌이며, 고향 경북 군위에서 서울까지 당시 유행하던 빌리 본 악단의 이화여대 내한 공연을 보기 위해 걸어서 왕복했던 문학소년이기도 했다.

일간지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하고 나서는 한번은 기쁨에, 한번은 문학에 대한 부담으로 두번씩 욕지기를 했다는 청년. 이후 20여년 간 그는 본격적 소설창작의 길보다는 번역가의 길로 나선다.

옛 사람들이 영어공부 한다고 사전을 한 장씩 외고 씹어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한 장씩 씹어먹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가 번역한 책 수는 자신도 정확하게 알지 못할 정도지만 200종이 훨씬 넘는다.

그는 그 많은 번역서들 중 가장 애착이 가는 한 권을 꼽아보라는 주문에 서슴없이 ‘그리스인 조르바’라고 대답했다. 이 책은 꼭 20년 전인 1980년에 그가 초역했다가 올해 새로이 번역해 출판한 작품이다.

늦게서야 돌아온 ‘황성옛터’(그는 요즘의 힘빠진 문학판을 이렇게 불렀다)에서 그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쓰고 있다.

이제서야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써보겠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에만 약 20권 가량의 소설, 에세이, 신화연구서 등을 낼 계획이다.

하지만 ‘두물머리’가 출간 한 달 만에 4쇄를 찍은 점에 무엇보다 고무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리 문학독자의 기층이 두텁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고 그는 말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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