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세계적 예술가이다. 세계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그날로 한국에서 떠받들려지기 시작하는 그런 부풀려진 ‘세계적’ 예술가가 아니다.미국 ‘아트 뉴스’지가 지난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25인에 피카소, 모네와 함께 선정했던, 진정 세계에서 평가받는 글로벌 아티스트이다.
TV에서 비디오, 위성, 레이저 등으로 점점 더 깊고 넓게 관객들과의 ‘소통방법’을 확장해 가고 있는 그의 예술은 처음엔 도발적이고 파괴적이었으나 나이가 들수록 화평하고 깊이 있는 작품으로 변화하고 있다.
8년 만의 국내 개인전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현대 미술사에 심오한 영향력을 미쳐온 백남준의 작품 100점(레이저, 비디오 등 작품 40점, 사진, 포스터 등 자료 60점)이 21일부터 10월 29일까지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동시에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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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낙관주의로 미래를 꿰뚫어보다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회갑기념전 이후 8년 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삼성미술관과 솔로몬 R.구겐하임 미술관 공동 주최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백남준의 세계’라는 전시명이 암시하듯 2~4월 뉴욕에서 열렸던 구겐하임 전의 제목과 컨셉(개념)을 통째로 빌려 온 전시회이다.
그러나 작품의 폭(range)은 더 넓다. 구겐하임에서는 빠졌던 백남준의 한국에서의 활동상황이 자료로 추가했고, 역시 구겐하임에는 출품하지 못했던 비엔나 미술관의 ‘조정된 피아노’까지 빌려왔다.
피아노와 자동차
‘조정된 피아노’는 1963년 독일에서 열렸던 그의 최초의 개인전 ‘음악 전람회_전자텔레비전’에서 선보였던 작품으로 피아노 외관에 인형, 사진, 장난감, 깨진 달걀, 심지어 브래지어 같은 잡동사니를 부착하여 피아노의 음색을 바꾸어(조정)낸, 그의 초기 행위예술을 오브제 형태로 기록한 독보적인 작품이다.
1960년대, 어렵게 살던 시절, 흑백TV 속에 백남준과 함께 나타난 요셉보이스가 멀쩡한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던 퍼포먼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피아노는 바로 그때 선보였던 네 대의 피아노 중 유일하게 남은 피아노(나머지 두대는 해체)이다. 전통을 파기하고 예술과 삶의 접목을 시도한 급진적 미술운동이었던 ‘플럭서스’시대의 귀한 자료이다.
또 용인 자동차 교통박물관 소장품인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조용히 연주하며’도 구겐하임에서 볼 수 없었던 작품. 로댕갤러리 외부에 전시되는 이 작품은 20세기 테크놀로지의 대표적 성과물인 자동차에 폐기 처분된 TV모니터를 싣고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한다. 애석하게도 32대 중 8대만 옮겨왔다.
그외 작품들도, 구겐하임의 리바이벌 전시회라고만 가볍게 넘길 수 없도록, 호암과 로댕갤러리의 공간에 맞게 철처하게 재창조됐다.
레이저 아트 ‘동시변조’
최고의 대작은 새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제작한 레이저 작품 ‘동시변조’(‘야곱의 사다리’와 ‘감미로움과 숭고함’두 작품으로 구성)이다.
유리로 씌운 로댕갤러리의 원형 전시장은 모두 검은 테이프로 발라 검은 우주공간으로 바뀌었고, 상설전시되던 거대한 ‘지옥의 문’마저 금속판으로 마감했다.
8㎙ 높이의 지그재그형 레이저 설치물 ‘야곱의 사다리’는 바닥에서 천장으로 힘겹게 사다리를 오르는 장면을 연출, 구겐하임보다 훨씬 선명한 레이저 빛으로 구원의 상징물임을 표현하고 있다.
뻥뚫린 원통형 달팽이 계단 모양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천·지·인(天地人)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단일채널이라 할 수 있는 TV와 비디오 작품이 전세계인을 상대로 한 인공위성(굿모닝 미스터 오웰)으로, 나아가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레이저로 작가의 정신세계가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진리는 ‘TV정원’ ‘촛불 프로젝션’ ‘촛불 TV’ 등 세 개의 작품이 어우러지는 호암갤러리의 1층 공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겐하임보다 훨씬 넓은, 이제까지 실현된 ‘촛불 프로젝션’ 중 가장 큰 공간(높이 8㎙, 총길이 24㎙의 대형 벽면)을 확보해, 한 자루의 촛불이 비디오 프로젝터라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얼마나 위력적이고 아름다운 불꽃들로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원색의 불꽃이 춤추는 벽면의 바닥에는 TV 브라운관이 마치 꽃송이처럼 누워 수많은 진짜 식물들과 ‘TV정원’을 이루고 있다. 대중을 길들여 바보처럼 만든다는 이유로 공격받아온 TV를 자연친화적 대상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병마와 싸우면서
아쉬운 것은 이번 전시회가 위대한 예술가 없이 열린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최근 당뇨병성 백내장으로 네번째 눈수술을 받았다.
눈수술 환자에게 기압의 변화가 심한 항공여행은 금기라고 한다. 그는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현재 반신불수 상태다.
백남준은 대신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전시장에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또 작품 설치를 위해 구겐하임의 큐레이터 존 핸하르트를 비롯, 레이저 기술자, 프로젝트 매니저 등 백남준의 ‘조수’ 10여명이 입국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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