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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일] 내 월남 탄식한 '공산당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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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일] 내 월남 탄식한 '공산당 친구'

입력
2000.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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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 있는 친구 용호에게.그렇다. 정말 그렇구나. 남과 북이 결국 하나라는 천리(天理)말이다.

네가 아직도 건강하게 그쪽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을 게다. 그래 이 녀석아, 공산당 친구야. 어릴적 싸리말 같이 타고 여름날 개울에서 실컷 물장구치고는 복순이네 원두밭에 들어가 원두를 줄기째 뽑아다 불살라 먹고는 시커먼 입술로 저녁 노을 향해 알지도 못할 군소리 냅다 지르던 놈아. “규동이 새끼 까불면 죽인다. 태호한테도 이기지 못하는 새끼. 날 업신여겨만 봐라. 당장 업어치기로 저 물창에 던져 버리지…하하하.” 이런 허튼소리 숱하게 내뱉으며 그래도 죽자사자 친했던 녀석아.

우리가 평양에서 헤어진 것이 1948년 1월이다. 그때 너는 ‘빵떡 모자’를 눌러쓰고 무슨 자료를 찾는다며 도서관에 자주 출입했다.

내가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던 ‘세계 시인전집’이라는 두툼한 책을 보고는 네가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기억나냐?

“야 이녀석아,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한가한 책이나 읽고 있냐. 이놈아, 그런 책 속에는 우리 민족의 문제같은 건 아마 한 줄도 나오지 않을 거다. 인민을 위한다면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 당장의 목표야.”이렇게 충고 비슷하게 한마디 하고는 신창리 빈대떡 집에서 막걸리를 마셨지. 이때는 토지개혁, 화폐개혁이 다 끝난 뒤였어.

밤중에 비판대회같은 것이 옥외에서 열릴 때,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 단상에 올라 사자후를 토하는 것도 너였고, 미제를 규탄하고 성토하는 것도 너였다.

이 녀석 용호야, 너는 그 무렵 정말 무섭고 겁나는 존재였다. 베토벤 같은 클래식 음악에 빠져 있다고 나를 부르주아 계급을 흠모하는 자라며 마구 지껄여 댔었지. 기억나냐?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과 사랑이지, 파괴가 아니라는 나의 대꾸에 너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응수했지. “너는 이광수같은 작가가 되고 싶은게로구나. 그렇담 이광수 만나러 남조선으로 가라.”

1948년 2월 내가 네게 아무말 않고 월남했었는데, 너는 이렇게 탄식했다는 말을 후에야 전해 들었다. “남조선은 돈없으면 굶어 죽는 곳이라는 데 규동이 그 애 불쌍해. 진짜 남으로 간다면 돈이라도 좀 줘서 보낼걸”이라고.

친구야 이산가족들이 만난다는데 우리는 가족이 아니라 볼 수도 없구나. 이녀석 공산당 용호 자식아. 죽기 전에 꼭 만나자. 둘이 부둥켜안고 땅이 꺼지도록 통곡해 보자.

/김규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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