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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모래사막에 꽃핀 東西교류사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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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모래사막에 꽃핀 東西교류사의 보고

입력
2000.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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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실크로드의 꽃으로 불리는 중국 둔황(敦煌)의 장경동(藏經洞) 석굴이 발굴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 장경동의 발견으로 둔황은 2,100여 년 동서 문화교류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보여주는 ‘중세의 백과사전’ ‘고대 학술의 바다’로 떠올랐다.인하대가 5년째 계속하고 있는 ‘책벌레 독서여행 프로그램’은 7월4~15일‘가자! 실크로드로’라는 테마로 둔황을 비롯한 실크로드의 주요 지역들을 답사했다.

홍정선(국문학) 김영민(행정학) 교수와 27명의 학생들이 함께 한 실크로드 기행의 동행 취재기를 싣는다.

모래가 운다. 명사산

‘은하수의 끝을 보고 온 사나이’.

중국인들은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張騫·?~BC 114)을 이렇게 부른다. 고대의 밤하늘, 은하수만이 반짝이던 미지의 세계 서역(西域)을 개척한 모험가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그 의미가 둔황의 명사산(鳴沙山) 정상에서야 실감될 수 있었다.

서역을 개척하던 수만의 군대가 이 거대한 모래언덕 속으로 사라져버린 후 밤이면 북소리 징소리처럼 모래울음 소리가 들린다 하여 그 이름이 붙은 산. 동서 40㎞ 남북 20㎞에 이르는 사막산에 뜬 달과 함께 바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올 듯한 무수한 별들의 축제가 장건의 길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인천항을 출발해 천인(天仁) 페리로 하루, 톈진(天津)과 베이징(北京)을 거쳐 만 이틀 만에 둔황에 도착한 일행은 명사산의 밤에야 실크로드에 닿은 것을 실감하는 듯했다.

이날 낮 둘러본 막고굴(莫高窟)에서 받은 감동과 함께 문화와 자연의 혼융일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둔황은 사막 가운데에 자리잡은 오아시스 도시다. 시안(西安)을 출발해 란저우(蘭州)에서 황하를 건너고, 자위관(嘉욕關)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끝을 지난 실크로드는 둔황에 이르러 비로소 서역의 관문에 도착한다.

수백㎞를 달려도 막막한 모랫벌과 암록색 바위산, 멀리 기련(祁連)산맥 정상의 만년설밖에 보이지 않던 지세는 둔황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이다. 기원전 111년 한나라 때 둔황에 도시가 건설됐다.

고대문명의 총화, 막고굴

막고굴은 이 접점에서 피어난 동서문명 교류사의 보고이다. 명사산 동쪽 기슭 남북 1,600㎙에 기원 4~11세기 동안 1,000여 개의 석굴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천불동(千佛洞)으로도 불린다. 주로 사원으로 사용된 이 석굴들에는 중국 북위 시대부터 수, 당, 송, 원대까지 이룩된 건축 회화 조각 등 종합예술의 광휘가 사막기후로 인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벽화와 조각상 등이 있는 492개의 석굴 중 관광객을 위해서는 현재 20여 개만 공개되고 있다.

한국에서 방문한 학생들을 맞아 석굴의 안내인은 특별히 일반에게는 잘 공개하지 않는 320, 328, 427, 428호 굴과 가장 오래된 석굴로 전실이 무너져 보수한 259호 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불교의 미남들’ ‘동방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아름다운 조각과 회화가 굴마다 천년 저편의 시간을 뚫고 빛나고 있었다. 중국의 학자들은 “인류 문명은 중국, 인도, 그리스, 이슬람 4대문명 이외에는 없지만 이 4대 문명이 한 곳에서 만난 지역은 세계에서 둔황밖에 없다”고 자랑한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교역을 위한 비단길만이 아니었다. 신라 고승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이곳에서 발견됐듯, 그것은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된 불법의 길이기도 했다.

동서의 경제와 문화, 모든 사람살이가 이곳에서 만나 문명의 총화를 이루었다.

동서교류의 열쇠, 장경동

장경동은 이 중 제17호 동굴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00년 6월 20일, 승려 왕위란루(王圓菉)가 16호 동굴의 모래를 쳐내다가 우연히 이 굴을 발견했다.

사방 3㎙도 되지 않는 공간 속에 5만여 점의 고문서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불경 외에 도경, 유가 경전, 역사서, 시편, 소설은 물론 호적, 장부, 달력, 서한과 빚문서까지. 한문은 물론이고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 여러 언어로 된, 그야말로 미궁에 갇혀있었던 고대·중세 동서교류사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였다.

장경동은 11세기초 서하(西夏)인들이 둔황을 침략해오자 스님들이 급히 이들 문서를 숨겨놓은 장소로 짐작된다. 장경동 발견 이후 100년간 세계 50여 개국에서는‘둔황학’이란 독자적 학문 분야까지 성립했다.

5만여 점의 고문서들 중 지금 중국에 남아있은 것은 1만 2,00여 점뿐이다. 안내인은 “3만여 점을 서양 탐험가들이 갈취해갔다”고 설명했다.

당시의 몽매한 청나라 왕실은 왕위란루에게 문서들을 개인소장하라고 지시, 문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석굴의 조각 벽화까지 무차별하게 팔려나가거나 도굴됐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에 많은 문서가 있고 일본, 한국에도 일부가 소장돼있다.

당시 실크로드 지역을 답사해 ‘중앙아시아에서의 3년’이란 저서로 유명한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는 1908년 장경동에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금강경’ 등을 발견했다.

그는 중국의 둔황 소개 책자에서 ‘도둑’으로 불린다. ‘왕오천축국전’도 그에 의해 파리국립도서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실크로드의 관문, 둔황 100주년

고대의 중국과 로마를 이어주었던 실크로드는 옥문관(玉門關)을 거쳐온 후 둔황에서 대략 세 갈래 길로 갈라진다.

양관(陽關)을 지나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는 누란(樓蘭)을 넘어 투루판, 우루무치를 거쳐 천산산맥의 북쪽을 지나는 천산북로, 천산산맥의 남쪽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흑해에 이르는 중도,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을 거쳐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를 지나 이집트에 도달하는 남로였다.

어느 길을 가든 둔황은 그 관문이었다. 2,000여년 전 광막한 사막을 건너기 전의 마지막 녹주(綠州)였다.

현 인구는 17만. 3.1만㎢의 도시 면적 중 5%가 오아시스로 백양나무가 주종이다. “연 강수량은 39㎜, 증발량은 2,000㎜이며 기련산맥 만년설의 눈섞이물(雪水·설수)로 식수를 댄다”고 안내자는 설명했다.

7월 26일 돈황에서는 중국 정부 주최로 장경동 발견 100주년 기념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릴 예정이다. 시내에는 곳곳에 100주년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나붙어있다.

연간 외국인 관광객이 7만여 명(그중 90%가 일본인이라 한다!) 찾아오는 국제적 명소이지만 둔황 사람들의 생활은 모랫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소박한 그것이다.

더운 날씨 탓에 낮에는 모래만 서걱되던 길이 밤이면 양고기 꼬치구이를 파는 회교도들의 노점으로 나와 고량주를 마시며 담소하는 시민들로 북적댄다.

양고기 꼬치 한 개가 50전(한화 약 70원). 32명의 답사팀이 푸짐하게 먹어도 부담없는 가격이었다.

홍정선 교수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저 유명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안서로 가는 원씨네 둘째를 보내며)’를 읊으며 노천강의(?)를 시작했다.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읍輕塵)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 권군경진일배주(勸君更盡一杯酒)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김소월은 이 시를 ‘위성 아츰 오는 비 길몬지나 적시네/ 푸르르다 순막뜰 버들가지 빗치야/ 여보게나 이 사람 다시 한 잔 드세나/ 인제 양관 나서면 어느 친구 잇스랴’라고 번역했다.

왕유의 시처럼 옛 둔황의 바로 곁 양관을 나서면 그곳은 친구 하나 없는 서역이었다. 1996년 중국의 연운항(連雲港)시와 유럽의 서쪽 끝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시를 잇는 철도가 완성됐다.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실크로드다. 2,100년 전 장건이 바라보았을 둔황의 은하수를 바라보며 학생들은 문명의 의미를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둔황=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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