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으로 ‘정숭호가 만난 사람’은 스무 번째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 기자의 특권이라면 벌써 스무 번이나 그 특권을 누렸다.스무 번째 이 특권을 확인시켜준 사람은 김진홍목사(金鎭洪·59·경기 구리시 두레교회 담임)다.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말보다 몸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 치열한 생을 이끌어온 사람, 그 삶의 결과로 한 시대와 한 사회에 자신의 지분을 형성한 사람, 그런 사람을 직접 만나 묻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묻고,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할 수 있는 게 특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리시 그의 자택에서 한 시간 남짓 그를 만났다. 그의 젊을 때 자서전 ‘새벽을 깨우리로다’를 읽은 뒤였다.
한 시간과 한 페이지의 지면으로는 그의 삶을 소개하기 힘들다. 불경일 수도 있다. 그의 지나간 삶보다는 그의 지금 생각과 믿음을 전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삶이 괴롭고, ‘무엇’이 옳은가가 궁금한 사람은 ‘새벽을 깨우리로다’를 읽으라. 기자는 그 책을 읽으면서 여러번 눈시울을 붉혔다.
이 기사를 끝내면 기자는 두번째 자서전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를 읽을 생각이다. 기자는 교인은 아니다.
구리시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
-신자는 물론 일반에서도 김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높다. 김목사가 무엇에 대해 말한다면 고개 숙일 사람이 많다. 요즘 시국을 어떻게 보나.
“등산길에 8부능선까지 오른 사람과 비슷하다. 그동안 쉬지않고 올라온 탓에 8부능선에서는 긴장이 풀어져 사고가 많이 난다.
피로가 쌓여 남은 2부 능선을 보면서 부담을 갖기도 한다. 이때문에 주저 앉는 사람도 많다. 지금이 통일한국이라는 정상을 앞두고 8부 능선에 오른 것이라면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고 마음을 다 잡아야만 정상에 갈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의료대란, 금융파업 등이 모두 8부능선에서의 긴장해이 때문 아닐까. 성경을 빌려 말한다면, 축복받을 기회를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그릇을 깨버린다.
다시 축복받으려면 한 세대가 걸린다. 성경에서 한 세대는 40년이다. 지금 잘해야 40년을 뒤로 가지 않는다. 서로 참으면서 ‘내가 손해를 보면된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_‘내가 먼저 손해를 보면되지’라는 생각은 말로야 쉽지만 범속한 사람들이 행동으로 따르기는 어렵다. 그런 가르침이 수천년 되풀이 되어온 것만 봐도 그 실천의 어려움을 알 수 있지않나.
“남을 살리면 자신은 자연히 따라 살 수 있다. 하늘이 낸 법칙이다. 혼자 잘 먹으려면 모두 못먹고, 남을 먹이려면 자기도 먹게 된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마음으로 목회활동을 해왔고 따라오는 신자도 많았다. 하기 힘든 일이라고 안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 이야기가 나와서 물어보는데 요즘 교회 목사직 세습이 문제다. 어떻게 생각하나.
“대형교회 목회자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보여주는 일이다. 해서 안될 것을 하겠다는 것은 그 분들이 상식선에도 못 있다는 이야기다. 목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능한 한 몸으로 살아서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런 뜻에서 나는 그 분들이 성경이 의미하는 목회자는 아니라고 본다.”
-목사님은 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선교를 했다. 성공도 했고. 그러나 지금 사회는 없는 자보다 가진 사람들의 문제가 더 크지 않나. 그렇다면 가진 자들에 대한 선교가 더 필요하지 않나. 그들을 깨우쳐 남을 돕는, 성경적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교가 더 쉬워서 그런가. 가진 자들의 논리와 지식과 배타성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
“그런 쪽에서 일하는 목회자도 있다. 성경은 일관되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강조한다. 내가 빈민선교에 나섰던 것은 성경적으로 살아보자는 생각에서 였다.
어쨌든, 1970년대의 빈민선교, 1980년대의 농촌선교, 1990년대의 공동체운동을 거쳐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는 이제 한국교회 바로세우기 운동을 하려한다.
한국 기독교가 우리 겨레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통일한국시대의 정신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는 중심 종교가 되기위해서는 체질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대체로 우리나라 교회는 미국 선교사 밑에서 자란 교회여서 복음의 순수성은 인정되지만 복음의 역사적 적용, 교회의 역사 의식은 빈약하다.
전도의 열기, 교회에 대한 충성은 뜨거우나 이웃사랑, 이웃에 대한 봉사는 약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국교회에는 ‘교인의 우민화’’치병기복(治病祈福) 중심’‘대형화, 물량화’‘목회자들의 귀족화’등 4가지 치명적 약점이 있다.
이 걸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 개신교는 우리 역사에서 한때 왕성했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지나간 종교로만 기록될 것이다. 지금의 교회를 어떻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복귀시키느냐가 이 운동의 핵심이다.”
-쉬울 것 같지가 않다. 일반교회의 반대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다행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많다. 의식은 있지만 힘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 뭉치면서 힘도 생길 것이다.
우리 생각을 따라주는 신자도 많다. 내가 지난 10년 공동체운동을 벌였던 남양만의 두레마을에서 일단 빠져나와 이 곳 구리에서 새로 목회를 한 것도 그런 목적에서다. 대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인구 18만의 구리는 교회개혁을 하기 좋은 곳이다.
이 곳에서 나는 한 도시의 정신, 청소년, 노인, 복지, 환경, 교육 등 모든 문제가 성경적 원리로 수렴되어서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교회를 통해 기여하고 싶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회개혁운동은 너무 늦었다.”
-구리로 온지 2년이 됐는데 그동안 교회바로세우기 운동의 성과는 있었나.
“생각대로 되고있다. 교인들도 서울 서쪽 끝에서도 찾아올 정도로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모이고 있다. 뜻을 같이 하는 목회자들도 많이 찾아온다. 인적자원이 모이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목자가 양을 찾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양들이 목자를 찾아온다. 내 생각이 옳음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적자원도 있어야 하지 않나. 의식만으로 될 일은 아닐 것 같다.
“인적자원이 있으면 물적자원은 따라온다.”
-개혁교회운동에 기성교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은가.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는게 문제다. 대형교회는 당회목사 월급이 700만원, 부목사는 150만원, 관리사찰집사는 70만원이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3명 모두 기본급이 120만원이며 식구 한명당 10만원씩인 가족수당을 주고 있다. 나는 거기에 목회수당 50만원해서 한 달에 220만원을 받는다.
부목사와 봉급차이가 불과 20만~30만원 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하다. 투명한 재정, 평등이 교회에서 실천되는 것을 보고 신도들이 따른다.
교회는 자본주의의 실천장이 아니다. 교회는 사회가 따르지 못하는 자유와 평등, 진실된 삶, 사랑과 나눔, 이런 것이 구체적으로 실현 되어야 하는 곳이다.
사장이 가장 많이 받고 수위나 급사가 제일 적게 받는 것은 사회의 논리이지 교회가 그래서는 안된다. 어쨌든 일반교회에서는 우리교회의 이런 방식을 비난하고 있다. 너네만 진짜 교회냐고 따져들기도 한다.”
-지도자의 몫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도자가 지도자이기 위해서는 물질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신앙의 지도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지도자에게 판공비가 필요하지만 영적 지도자에게는 청빈이 가장 큰 지도력일 것이다.”
-자서전에서 보면 ‘큰 목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큰 목사란 무슨 말인가. 김목사는 큰 목사가 되었나. 우리나라 교회에 큰 목사가 있었나.
“불교에 큰 스님 개념이 있다. 원효대사 사명대사가 큰 스님이다. 그런 개념인데 신앙과 삶이 일치해 예수님이 인정하고, 끝없는 헌신으로 백성들이 따르는 목사가 큰 목사이다. 한경직목사 김재준목사 길선주목사 이성복목사님들이 큰 목사이시다. 나는 아직 멀었다.”
-노동운동, 활빈운동, 구민운동 나아가 농촌운동은 모두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종교인이 아니면서도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그런 사회활동을 하기 쉬워서인가.
“종교인이 사회운동을 하는 것은 종교적 신념의 실천이라면 일반인의 사회활동은 휴머니즘적 입장에서 접근, 개혁과 봉사에 나서는 것이다.
둘이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종교인에게 사회봉사는 실천사항이어서 더 지속적이고 헌신적이며 순수하다고 본다.
일관성도 있을 것이고.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금방금방 운동의 방향성이 달라지는 때가 있다. 종교적 실천과 달라 자신도 모르게 요령을 피울 때도 있을 것이다.”
"가정 등한시한것은 후회됩니다"
-목사님이 30년간 사회적 목회활동을 하는 사이 가족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어떻게 보상 하고 있나.
“열심히 살아왔지만 두 가지 후회가 있다. 첫째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곧 환갑인데 갈수록 지적 한계를 느낀다.
일꾼은 영적, 지적, 인간적으로 성숙한 만큼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빈민가나 농촌 등 현장서만 일하다 노가다 기질만 굳어졌다.
지적 부족을 느낀다. 독서를 한다고 하지만 체계가 없다. 두번째 후회는 남을 돕는다면서 가정을 등한시했던 것이다. 대가를 호되게 치뤘다. 가정도 한 번 깨지기도 했다. 그래서 후배 목회자들에게는 가정을 지키면서 일해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말해준다.”
-젊은 목사들이 몸바쳐 일 하지 않으면 제2의 김진홍이 나올 수 있을까. 성직자들이 일신의 편함과 사회에 대한 봉사를 같이 가져갈 수 있나.
“전문화하면 된다. 몇달 일 하다 곧 죽을 것 처럼 해서는 안된다. 절제해야 한다. 성경은 좋은 일에도 절제를 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위한 일에 대해서도 절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30대에 절제를 못하고 내가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서 그 것만 해왔다. 그 것을 후회하는 것이다.”
-목사님 말씀이 다 옳아도 아직 교회에 나갈 생각은 없다. 나는 일요일 교회에 가지 않고 산에 간다.
부부가 손잡고 산에 오는 것이 보기 좋아서 집사람에게 ‘부부가 나란히 산에 오르는 것이 보기 좋더라’고 말하면 집사람은 ‘부부가 교회에서 나란히 찬송을 부르는 것이 보기 좋더라’고 맞받는다.
“힘이 더 빠지고, 죄를 더 지으면 결론이 날 것이다. 오고 싶을 때 오라. ”
이밖에 그로부터 남북문제, 공동체문제 등에 대한 의미 깊고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말, 지면 사정상 모두 옮기지 못했다.
●약력
대구 계명대 철학과 졸업 1966
청계천 판자촌에 활빈교회 설립 1971
장로회 신학대학원 졸업 1974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 1974~1975
청계천 철거민과 경기 화성군 남양만으로 귀농 1976
자서전 ‘새벽을 깨우리로다’출간 1982(홍성사·2000년 7월 현재 90쇄 발행)
화성군 남양만에 두레마을 설립 1986
경기 구리시에 두레교회 설립 1998
자서전 ‘황무지가 장미꽃같이’출간 1999(한길사)
현재 두레마을 대표 및 두레교회 담임 목사
편집국 부국장
soongchung@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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