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정말 살아있습니까. 그이 제사를 지낼 때면 한번이라도 다시 볼 수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 데…”북측의 8·15 이산가족 상봉단원에 남편 김중현(金重鉉·69)씨가 포함돼 있다는 소식을 서울 양천구 신월7동 자택에서 접한 유순이(柳順伊·71)씨는 기쁨보다는 설움과 한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남편을 그리며 수절해 온 50년의 모진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씨가 남편과 헤어진 것은 6·25 발발 직후. 결혼한 지 불과 6개월만이었다. 남편 김씨는 충북 청원에서 농사를 짓다 임신 3개월인 유씨를 남겨둔 채 북한의 의용군으로 차출됐고 1년후 시숙 김국현씨 마저 국군으로 참전했다.
유씨는 이후 시부모와 함께 어린 시동생 셋과 갓난 아들을 고스란히 키워야 했다. 시숙의 부인마저 출가하자 조카 둘을 비롯, 6명의 아이를 장성할 때까지 뒷바라지했다.
“원망할 일도 없습니다. 남편 뜻대로 의용군으로 간 것도 아니고 형님 대신 차출돼 19세 때 떠났는데 누굴 탓해요.” 유씨는 아들과 조카, 시동생들이 장성한 이후에도 신고(辛苦)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73년 중풍에 걸려 유씨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4년을 봉양했다.
77년 아들(50)을 따라 고향 땅 2마지기를 팔고 상경해서도 공장 식당과 남의 밭에서 일을 해주며 아들 내외를 도왔다.
79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유씨는 남편의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20년전부터 그 사람이 집을 나간 6월에 날을 잡아 (남편이)보지도 못한 아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지요”라며 눈물을 훔쳤다.
북에 있는 남편 김씨는 이산가족상봉자 가족명단에 부인 유씨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유씨는 “정도 들기 전에 헤어졌으니 당연히 재가한 줄 알았겠죠”라며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어쨌든 만난다니 지난 50년 고생의 하소연은 할 수 있겠네요”라며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애지중지해 온 남편의 사진을 어루만졌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