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을 푹 둘러쓴 채 눈만 내놓는 아이들, 행여 무서운 장면이 나올세라 얼굴을 가리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빠꼼히 엿보던 공포물의 재미. 서양의 고스트보다도, 중국의 강시보다도 마음을 얼어붙게 했던 ‘전설의 고향’은 한국적 공포물의 진수였다.1977년부터 무려 12년간 방송되었던 ‘전설의 고향’, 96년에 다시 부활되어 작년까지 방영되었지만 올해는 제작비 부족으로 브라운관에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80년대부터 다년간 ‘전설의 고향’을 연출해 온 PD들이 말하는 한국적 공포에는 나름대로의 문법이 있다.
하나는 뒤통수를 찌르는 의외성이다. 이슥한 밤, 산기슭의 흉가를 지나는데 뒷목이 쭈뼛해서 뒤를 돌아보니 소복입은 처녀가 하얗게 째려보고 있다.
숨막히는 공포로 말문이 막힐 즈음, 처녀는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지나간다. 휴우 하고 한숨을 돌려 쉴 무렵 그녀는 닭장 앞을 지나친다.
그때 그녀의 손에 든 뭔가가 커다랗게 부각된다. 바로 피투성이의 닭모가지. 놀랄 만한, 무서울 만한 장면에서 뭔가를 탁 꺼내놓고 시청자에게 공포를 강제하는 방식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게다가 제아무리 무서운 귀신이라도 뭔가 사연이 있다. 모함을 당해 누명을 쓰고 죽은 총각귀신, 시앗을 보고 분하고 억울해서 목맨 아낙네 등, 이들은 아무리 끔찍한 복수극을 펼치다가도 한바탕 설원과 함께 그 원한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리고 아릿하게 남는 여운. 바로 오뉴월에도 서리를 맺히게 하는 ‘한’이야말로 드라마틱한 한국적 공포의 백미다.
첨단 특수효과도, 쓸데없는 피도 필요 없다. 또하나, 청순가련한 여배우의 깜짝변신이 주는 공포도 만만찮다. 근래의 호러물 중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MBC ‘M’은 탤런트 심은하의 양면성을 잘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전만큼 공포의 급소를 찌르지 못해서일까, 언젠가부터 제대로 된 한국적 공포물을 접하기 힘들어졌다.
대신 첨단 특수효과로 뒤범벅된 국적불명의 스릴물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본격적인 ‘공포’보다는 세련된 과학지식과 특수효과, 초호화 출연진에서 볼거리를 찾는 정도에 만족한다.
그나마 긴장감이 떨어지면 장르도 불분명한 엉성한 드라마로 참패하기 마련. 바로 작년 방송된 SBS‘고스트’의 교훈이다.
KBS의 ‘RNA’역시 ‘흥행’요소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연기, 다중인격체라는 어디서 본 듯한 모티프 때문에 기대 반, 우려 반으로 10일 시작했다.
최첨단 스릴러보다 ‘전설’에 대한 열망이 더 강렬한가. KBS는 96년 이후 ‘전설…’ 히트작 재방영을 추진중이다. 미흡하나마 한국적 공포를 되새길 수 있을 듯하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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