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개인들의 삶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역사를 일구는 데 개인이 거드는 만큼의 의미일 것이다. 반대로 역사에 의미가 없다면, 개인들의 삶도 무의미할 것이다.그때 인간의 삶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길든 짧든, 신산하든 감미롭든, 화려하든 소박하든, 우주의 우연이 빚어낸 한 바탕의 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 신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출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기독교 신자라면, 역사와 삶에서 ‘섭리’라는 이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역사와 삶에서 ‘법칙’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신산한 삶일지라도, 소박하기 짝이 없는 삶일지라도, 그것이 섭리나 법칙을 통해 역사에 매개되면, 적어도 그만큼의 의미는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독교인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에게 역사와 삶은, 더 나아가 우주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캐나다의 천체물리학자 휴버트 리브즈의 ‘취(醉)할 시간’(1986)은 섭리도 법칙도 받들지 않는 사람들이 역사와 삶에서 길어낼 수 있는 의미의 물줄기를 탐색한다. 그 탐색의 종착지는 다소 밋밋해 보이는 윤리적 강령에 불과하지만, 그 탐색의 행로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눈길 위에 섬광처럼 아름답고 휘황한 성찰들을 싣고 있다.
타인·자연에 대한 존중
민주주의적 투명성등
인간의 진화가 곧 우주의 진화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샤를 보들레르의 시 ‘취하세요’의 한 구절에서 빌어왔다. 그러나 보들레르에게 취기(醉氣)가 권태와 고역의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리브즈에게 그것은 조심스러운 낙관주의에 실린 즐김의 은유다.
이 함축적이고 시적인 표제보다는 차라리 이 책의 딱딱한 부제 ‘우주에 의미가 있는가?’가 리브즈의 탐색을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다.
‘취할 시간’은 반전·반핵이나 생태주의를 내세우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히로시마 이후에 지구 문명이 소멸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는 인식을 논의의 깔개로 삼고 있다.
핵 폭탄은 지하 병기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장착돼 있다. 우주 전체에서 이런 상황에 다다른 문명이 몇 개나 되고, 그 문명들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리브즈는 독자들에게 우리의 문명이 우주 안의 유일한 문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넌지시 내비친다.
리브즈는 이 책에서 우선 빅뱅 이래의 우주의 역사를 훑는다. 그의 분석을 관통하는 열쇠 개념은 ‘복잡성’이다. 최초의 폭발 곧 빅뱅 이래로 우주가 진화할수록, 물질의 조직 형태들은 새롭게 복잡성을 더한다.
현재 물리학자들에게 알려진 가장 원초적인 입자는 쿼크다. 그 쿼크들의 일부가 서로 결합해서 핵자(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자와 중성자)를 이루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 다음에는 원자가, 그 다음에는 단순 분자가, 그 다음에는 바이러스처럼 생명이 있는 유생분자(有生分子)가, 그 다음에는 생체조직이 만들어진다.
그 생체조직 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간의 뇌(腦)다. 우주 안에 퍼져 있는 물질의 한 부분이 상위 단계로 조직되기 위해서는, 열의 불균형이 일어나야 한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온도의 격차가 그 한 예다.
이런 불균형들 또는 불안정들은 또 다양성을 낳는다. 안정된 우주에서라면, 존재하는 것은 철(鐵) 원자들뿐일 것이다. 철은 가장 안정된 원자 상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균형은 비옥함이나 풍요로움을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불균형들이 없다면, 우주에는 복잡성도 다양성도 없을 것이다. 이 불균형은 우주의 ‘삶의 충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복잡성의 피라미드에서 한 단계를 새로 발견할 때마다 새로운 과학이 탄생했고, 그때마다 우주는 수정된 의미를 부여받았다.
고대 종교들의 우주관에서 시작해 고전과학과 상대성 이론을 거쳐 빅뱅이론에 다다른 우주론의 역사는 새로운 과학의 탄생과 거기에 따른 우주의 의미 변화 과정을 보여 준다.
물리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인간의 출현은 우연찮게도 우주의 역사에서 몇 가지 결정적 단계들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우주의 매개변수들이 이해의 영역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이다. 예컨대 원자들의 구조적 안정성이나, 행성 움직임의 규칙성이 그런 것들이다.
원자들의 구조적 안정성은 분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체들의 구성에 필수적이다. 그러니까, 우주는 공교롭게도 그것을 관찰할 누군가가 있을 때 비로소 관찰할 만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분명히 우주는 인간이 없이 출발했지만, 그 우주의 역사는 마침내 우리들의 존재로, 인류의 존재로 귀착했다. 그리고 그 인류는, 우리가 아는 한, 우주를 관찰하고 연구할 능력을 갖춘 첫번째 존재다.
그러나 그 인류는 또한 우리들 자신과 우리 행성을 파괴해버릴 수 있는 첫번째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인간이 우주의 목적이라는, 투박한 인간중심주의적 우주관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브즈는 이 지점에서 독자들을 복잡성의 원리에 대한 성찰로 초대한다. 우주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 원리는 우리 종(種)이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 결정적 순간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들의 ‘죽음의 충동’을 풀어놓음으로써, 우리가 없는 상태에서 세계가 끝장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우주의 무의미를 정당화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삶의 충동’으로 충일한 자연의 환상적 재간에 경탄하며, 그것을 기꺼이 본받아야 하는가? 물론, 죽음의 충동이 삶의 충동에 내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진화된 종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양을 취하고 적응을 해야한다.
그래서 그 종을 이루는 개체들은 죽이고 죽는다. 죽음이 있어서, 생식이 있다. 그리고 생식은 종을 더 경쟁적으로 만드는 돌연변이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인간은 이 경쟁에서 결정적 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지능은 자연계의 다른 생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뛰어나, 그는 살아남거나 죽이는 데 최적자(最適者)다.
반면에, 종교가 우주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고대 이래로 우리 인류가 점차 왜소화(矮小化)한 것도 사실이다. 코페르니쿠스와 뉴튼은 인류를 두려움으로 떨게 할 무한의 공간을 열었다.
다윈과 근대 생물학은, 특히 ‘우연’의 개념을 통해서, 창조론에 결정타를 날렸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자신의 비극적 운명 앞에 홀로 맞서라고 면박을 주며 그를 내팽개쳐버렸다.
그러나 리브즈는 과학이 우주 안에서의 우리 인류의 위치에 대한 만족스러운 전망을 다시 보여주고 있다며 우리를 격려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1백50억년동안의 회임기(懷妊期)를 거쳐서 우리를 낳아준 우주”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바로 우리 인류가 복잡성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주의 의미는 활짝 열려 있다. 우주에 의미가 있느냐의 여부가 사람 하기에 달렸다는 이런 자긍심으로부터 리브즈는 다소 틀에 박힌 윤리를 끄집어낸다.
예컨대 타인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든지, 과학자들 특히 대중화 저자들의 정직이라든지, 민주주의적 투명성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것은 삶의 충동을 고양시키며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의 일부다. 그 다음에는 무얼 하는가? 리브즈는 기뻐하라고 말한다. 지금은 취할 시간이므로.
편집위원
aromachi@hk.co.kr
■리브즈의 책 제목 ‘취할 시간’(L’Heure de s’enivrer)이라는 구(句)가 나오는 시(詩) ‘취하세요’(Enivrez-vous)는 보들레르(1821-1867)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 서른세번째로 실려 있다.
취기는 보들레르 시의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하나다. 이 시에서 보들레르는 결국 패할 수밖에 없는 시간과의 싸움의 무기로서 취기를 제시한다.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시간과 싸우려면 술에든, 시에든, 덕성(德性)에든 취해야 한다. 그것은 싸우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싸움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 편, 이 시에서 싸움의 대상으로서의 그 시간은 인간의 실존적 유한성보다는 일상적 권태와 더 관련돼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시 ‘취하세요’의 전문은 이렇다.
늘 취해 있어야 해요. 모든 게 거기 있지요. 그것만이 유일한 문제예요. 당신의 두 어깨에서 힘을 빼 당신을 땅 쪽으로 구부러뜨리는 끔찍한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으려면, 당신은 계속 취해야 해요.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에든, 시에든, 덕성에든, 당신 마음대로예요. 어쨌든 취하세요.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에서든, 도랑의 녹색 풀 위에서든,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속에서든, 당신이 깨어나 보니, 벌써 취기가 옅어지거나 사라졌을 때, 물으세요.
바람에게든, 물결에게든, 별에게든, 새에게든, 시계에게든, 달아나는 모든 것에게, 신음하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으세요.
몇 시인지를 물으세요. 그러면 바람, 물결, 별, 새, 시계는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할 거예요. “이제 취할 시간이에요! 시간에게 학대당하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세요. 계속 취하세요. 술에든, 시에든, 덕성에든, 당신 마음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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