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발연구원(KDI)은 대표적인 국책 연구기관으로, 국가경제정책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관변(官邊) 싱크탱크다. 그 KDI가 정부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연구결과를 정부의 검열없이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KDI의 주장은 이렇다. 관할 부처인 재정경제부가 정부 정책에 비판하는 내용은 발표 하지 못하게 하고 경제상황을 이유로 특정 연구결과 발표시기를 연기하거나 실업률 등 민감한 전망치에 대해서는 사전에 수정을 요구하며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언론 인터뷰 등 개인 의견의 개진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원의 기본적인 활동에 대해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양측간 어느 정도 사전 조율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전 검열이 그토록 심했다는 것인가. KDI가 발표하는 각종 경제전망이나 특정 이슈에 대한 분석 등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져 언론 등에서 비중있게 다루었고국민들도 액면 그대로 믿었는데 이제 보니 정부와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KDI는 ‘홀로서기’를 선언한 후 재경부의 항의를 받고 곧 입장을 바꾸었다. KDI는 원장 주재 회의를 갖고 발표방식의 변경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결정한 바 없으며 앞으로도 연구결과는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KDI는 제대로 힘 한번 못써보고 주저앉은 꼴이 됐다.
그러고보니 지난해말부터 올초에 걸쳐 각종 연구기관이 올해 경제전망치를 발표했을 때 KDI는 유독 실업률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당시에도 정부의 ‘압력’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높은 전망치로 공연히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다. 한국은행과 산업연구원 등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기관들의 전망에서도 실업률란은 비어있었다.
정부로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책 연구기관들이 정부정책에 도움을 주는 연구를 하기는 커녕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제동을 거는 활동에 치우치고 있다면 이는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국책 연구기관의 일차적인 역할은 정부정책 수립에 도움이 되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입맛에 맞는 내용만을 내놓는 국책 연구기관이라면 이는 세금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없다. 재벌의 ‘황제 경영’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는 정부가 이와 비슷한 위치에 올라서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정부 스스로가 권위와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있다. 이런 정부 부문이야말로 구조조정의 우선 대상이다.
얼마전 일본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뻥튀기했다가 국제적으로 큰 망신을 당했다. 일본 경제기획청은 지난 5월 25일 99년 4·4분기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 1.4%에서 마이너스 1.6%로 하향수정한다고 발표했다. 기획청이 성장률 수정치를 발표한지 2주일만에 수정한 것으로, 단지 통계적인 관점에서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날인 24일 뉴욕타임스가 “일본의 관제 경제통계는 지금까지도 항상 믿을 수 없었다”며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인위적으로 높게 조작된 것 같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설비투자 집계에서 오류를 범한 결과로, 전망치와 실적치가 큰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전망치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경제대국’ 일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통계지식을 가진 관리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 이를 관장할 적절한 감독체계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오부치 전총리가 쓰러졌을 때 정보공개가 늦은 것 등 일본 불신, 정치 불신이 통계 불신을 증폭시킨 본질적인 이유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연구결과를 통제하는 마당에 통계수치에 대해서는 손을 보는 일이 없을까.
이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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