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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다시본다](13)한국전쟁의 국내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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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다시본다](13)한국전쟁의 국내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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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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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미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mlpark@fas.harvard.edu

전쟁이 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고 깊다. 그것은 종종 몇 세대, 몇 백년을 넘기 일쑤다.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앞으로도 수세기를 더 지속하며 긴 역사적 자장(磁場)을 드리울 것이다.

1876년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출발 이후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한국사회는 주검과 절망만이 가득찬 역사적 영년(零年)이었다.

국토를 뒤덮은 시체더미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전쟁고아의 모습은 모든 희망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국민들은 폐허 위에서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민주화를 바탕으로 전후 한 세대만에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을 치러냈다.

전쟁 때문에 놓인 분단의 극복에 실패한 것을 제외한다면, 전쟁의 영향도 엄청났지만, 그것의 극복 속도 역시 눈부시게 빨랐음을 알 수 있다.

▥'3층구조' 분단질서 고착

한국전쟁의 종식이 가장 먼저 초래한 효과는 분단질서의 고착이었다. 전전의 분단이 잠정적 분단이었다면 전후의 분단은 고정적 분단으로 변전되었다.

통일을 목적으로 시작한 전쟁이 통일을 상당기간 불가능하게 만들어 오늘날까지 민족분단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전후 한반도 휴전체제는 세계냉전체제의 하위질서로서 확고한 국제적 보장을 받았다. 남한과 북한의 한반도 분할계선은 세계적 수준에서는 자본주의진영 대 사회주의진영의 분할선으로 인정되었고, 동아시아지역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에 의해 담보되었다.

이같은 분단질서의 3층 구조는 전쟁의 재발 위협을 크게 약화시키며 휴전선의 장벽을 높임으로써 남북한 각각의 독자적 발전추구노력의 공간을 확장시켜주었다. 동시에 분단으로 인한 남북의 상시대결(常時對決)구조는 남북한에 위협의 동원을 통한 인민적·국민적 단결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하늘을 찌르는 상호적대와 서로 앞서려는 상대와의 투쟁적 경쟁은 남북한 인민 각각의 결집과 집단정신의 분출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독자적 문제해결능력 훼손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을 각각 미국-일본-남한 대(對) 북한-중국-소련으로 이루어진 위계적인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전방 초소로 변전시켰다.

즉 세계냉전의 동아시아적 축도가 한국분단이었던 것으로, 세계와 냉전의 조응은 한국과 분단을 만나도록 했다. 따라서 냉전의 해체없이 이 전쟁이 놓은 구조인 분단의 해체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전쟁을 거치면서 한미관계는 남북분단과 적대구조의 역사적 쌍생아(雙生兒)로서 매우 특수한 관계에 놓이지 않을 수 없었다. 주한미군 주둔과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대표되는 공고한 군사안보와 막대한 경제원조는 이를 담보하는 두 축이었다.

남한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활용하거나 또는 이에 저항하면서 전후 남한을 자본주의 중심부에 밀착시켰고 이를 통해 이른바 “초청에 의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미 의존은, 확고한 안보공약과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는 한편 오랜 역사를 갖는 민족으로서의, 주권국가로서의 군사적 정신적 문화적 독립성과, 우리 문제에 대한 독자적 대응능력의 부분적 훼손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전쟁이 놓은 최대의 질곡인 분단의 극복, 곧 통일은 중국의 변방, 일본의 식민통치에 이어 나타난, 열강의 이해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오는 한국의 이러한 오랜 특성을 뛰어넘는 한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평등주의 의식 확산

한국전쟁이 초래한 사회변동의 문제와 계급관계의 변화 역시 중대한 함의를 갖고 있다. 전쟁을 거치며 지주를 비롯한 구체제 지배계층들은 물적 토대를 상실했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사회세력관계의 균등화(均等化)를 가져오면서 한국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하던 전래의 양반-상인의 반상구조를 해체한 중대한 계기였다.

전통적 유교세계관에 따른 양반-상인 양분의식(兩分意識)은 이 전쟁을 계기로 크게 약화되었다. 세계적 규모의 전쟁의 최초 경험과 공산주의사회라는 신분질서의 역전, 총칼 앞에서의 차별없는 죽음의 목도 등은 평등주의의식을 확산시키면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눈뜸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도시와 농촌, 지역과 지역, 남한과 북한 사이의 격렬한 인구이동과 사회적 유동성의 증가 역시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소규모 공동체의식을 깊숙이 파괴시켰다.

대면(對面)사회 내에서 유지되던 인간관계는 훨씬 더 넓은 공동체의 단위로 통합되며 좁은 범위에서의 위계적 수직적 인간관계를 해체시켰다. 전쟁은 평등의식과 근대 대중사회의 도래에 하나의 뚜렷한 전환점을 이루었던 것이다.

▥보편적 역사인식 상실

체제의 균질화 역시 전쟁의 결정적인 영향의 하나였다. 남북 모두에서 체제반대세력은 전부 월북·월남하였거나, 체계적으로 제거되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체제통합의 정도는 크게 높아졌다.

남북한 각각의 체제통합의 정도와 상대방과의 체제 이질성의 정도가 상호비례적으로 높아졌던 것이다. 이렇듯 전쟁은 이질요소를 뿌리뽑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남북한의 이념적 지형을 좌·우파 일색으로 정렬시켰다.

민주적 공간을 갖는 남한에서도 국민들은 상이한 이해를 갖는 계급으로 투표하기보다는 하나의 국민으로서 투표하면서 이념적 정책적 차이를 보여주는 계급성에서는 대단히 미약했다.

한국정치에서 이념적 정책적 요소가 표출되기 어려운 조건은 한국전쟁이 초래한 정치지형의 역사적 형성과 연결된 것이었다. 전쟁 직후 전후체제 초기의 반공·반북주의와 반미·반남이데올로기는 남북한 체제정당성의 원천이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이성을 통해 인간의 삶과 정신,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보편의 역사, 보편의 눈을 상실했다. 전쟁이 설정한 분단의 정신구조는 세계와 사회의 절반만을 진리로 인식하는 질서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타자에 대한 수용노력은 곧 현실법규의 저촉을 받았다. 우리의 내면에서 분단질서가 붕괴되는 과정은, 우리의 의식이 분단이 가한 외눈박이 정신구조를 먼저 타파하고 보편에 눈떠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한의 경우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는 국가형성과 수호의 근본기치였기 때문에 국가의 존재이유(raison d'etre) 그 자체이기도 하였다. 가장 강력한 반공이 가장 강한 정당성을 소유하는 인식과 행태가 일상화하였고, 행동의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반공주의와 시민의 도전

반공주의는, 10만에서 60만 대군으로 성장한 군대의 비약적 팽창과 함께 전후 한국에서 권위주의를 지속시킨 2대 핵심요소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군대는 사회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급속히 팽창되었고, 구성의 성분면에서도 사회의 최하계층에 까지 광범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군은 강력한 단결력에 기초해 체제수호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군의 비대화와 정치화는 병영내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민군간의 경계를 넘어 사회에 개입할 개연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위협적인 요소였다.

정당과 의회, 정부의 문제해결능력이 약화된다면 국가와 시민사회는 직접 충돌할 것이고, 시민사회가 분단국가의 근본질서를 위협할 가능성이 보인다면 거대하게 팽창한 군부의 국가장악 의지를 제어할 견제역량은 사회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요컨대 전쟁은 사회의 부문별 발전속도의 심대한 불균형을 초래함으로써 오랫동안 지속된 군부 권위주의의 역사적 기반을 제공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공산침략’을 저지시킨 정권을 7년만에 타도하는 4월혁명의 성공이 보여주듯 시민사회의 도전의 성공은 반공주의를 통한 국가의 헤게모니구축 전략이 사실상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공주의에 맞서는 다른 한 특징은 점점 증대되는 자유주의·민주주의로서 반공주의와 자유주의·민주주의 사이의 충돌은 후자의 성장에 힘입어 점차 심화되어갔다.

‘공산침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분리해낼줄 아는 지혜를 갖는 시민사회의 역할로 인해 한국민주주의는 전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주항쟁과 6월항쟁을 거쳐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룩해낸 도정은 이 둘을 분리해낸 한국민들의 집합적 혜안의 산물이었다.

▥집단적 단련, 발전 원동력으로

전쟁의 영향은 내면의 정신구조에서도 두드러졌다. 전쟁은 현실에서의 극한적 절망과 그것의 반면적 표출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함께 안겨주었다. 현실에의 절망이 미래의 피안을 추구하도록 안내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생존에의 강렬한 의지로 나타났고, 이를 통해 한국인들은 강력한 생존능력과 경쟁의지를 갖는 집단으로 변전되었다. 전후 한국민들의 눈은, 남북을 막론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앞서 나가야겠다는 강한 의지와 이글거리는 경쟁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공할 죽음, 고난이 가한 시련은 한국민들에게 단련과 인내를 함양시켜주었고 이는 현실에서 무서운 폭발력을 가지며 난관을 타개해나가는 집단의지로 표출되었다.

그것은 때로는 놀라운 교육열로 나타났고, 때로는 빠른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위한 열정의 폭발로 분출되었다.

한국판 ‘디아스포라’라고 부를 수 있는, 전후 전체 민족의 10%에 달하는 한국민들이 해외정착에 성공한 것은 역시 한국민들의 생존능력과 의지를 잘 보여준다.

경쟁적인 국민적 집단정신구조로 인해 50년대의 교육과 종교의 발전, 60~70년대의 경제발전, 80년대의 민주화투쟁 등 근대의 핵심의제를 성취하려는 노력의 표출에 있어 전후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압축발전’‘고속성장’이라고 부를 만큼 빠른 변화를 보여주었다.

전쟁 직후 두드러진 현상이었던 교육과 종교(특히 기독교)의 성장은 ‘기적’에 가까울 만큼 폭발적이었다.

전후 교육의 기록적인 성장은 식민, 전쟁과 살육을 초래한 자기세대의 무지와 비이성을 다음 세대에게는 결코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종교의 폭발 역시 현실의 거대한 죽음과 극단적 절망으로부터 탈출하여 신에게

의탁하려는 절대희망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전쟁이 가한, 울혈(鬱血)이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충격으로 인해 형성된 집단적 의식구조에 연결되어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어떤 부분에서도 이러한 빠른 성장의 이면을 반추하는 성찰은 당대에는 불가능했다. 그러한 성찰을 통한 성숙사회로의 도약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에 급급했던 세대의 다음세대에게 맡겨진 역사적 과업일지 모른다.

전쟁의 영향으로부터 지혜롭게 멀어질수록, 우리는 그것이 가져다준 경성(警醒)을 잃지 않는 가운데, 질높은 성숙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17일(월)자에 ‘한국전쟁이 북한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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