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가 71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어 낸 것을 보면 세상사에는 무언가의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 말이 71년이지, 한 나라에 하나의 권위와 지배원리가 그만큼 오랫동안 지속됐다는 사실은 상상만 하기도 쉽지가 않다. 한국이 그랬고, 인도네시아가 그랬고, 얼마전 대만이 그랬을 때 이를 민주화의 도미노라고 했었다. 인위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큰 흐름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만, 아시아지역의 이 흐름이 태평양을 멀리 건너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데 불과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아시아정치와 남미정치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아니다. 한 시대에는 분명 그 시대의 흐름이 있다.이런 것을 민주화라고 한다면 이 민주화의 척도는 바로 자유선거이다. 적법절차가 보장되는 가운데 유권자들이 아무런 억압없이 자유의사를 표현해 정치를 움직이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통해 반대파가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고, 이 반대파가 이길 수도 있는 게 민주화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선거만으로 민주주의는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게 되는가.
한 통계에 따르면 지금 전세계에서 선거를 통해 뽑은 지도자를 갖고 있는 나라는 60%가 넘는 것으로 돼 있다. 이 통계에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민주화 비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선거도 선거 나름이라는 사실, 달리 말하면 위장된 민주주의가 얼마든지 만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멕시코선거의 경우에서도 선거의 묘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민주주의는 오히려 선거 이상의 무엇이다. 실질적인 호환기능을 발휘하는 정당구조, 완전한 독립사법 장치, 행정부에 대항하는 강력한 의회기능 등 제도의 총체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적 사고와 정신, 민주주의적 문화이다.
이런 점에서 의심스러운 국가 중 하나는 바로 러시아이다. 옛 강대국의 영화(榮華)를 잘 읽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은 정교한 선거기획의 개가였지만 지금 푸틴을 보는 국제적 시각은 착잡하다. 우리의 짐작을 훨씬 넘는 정도의 비판적 논조를 누리는 줄 알았던 러시아언론은 얼마전 푸틴정부의 기습공격을 당했다. 바로 언론재벌 미디어모스트 그룹의 구신스키를 전격구금한 사건이다. 푸틴의 의도된 언론탄압이었다면 독재적 통치 회귀가 문제될 것이고, 의도를 안했던 수하조직의 잘못이라면 정권의 성격이 달린 중대사를 제지하지 못한 국정장악 실패의 증거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렀던 사건이었다. 지방주지사의 독립적 지위를 박탈한 권력수직화 법안의 강행 역시 푸틴을 알 수 없는 인물로 비치게 했다. 푸틴정권이 민주적 정권인가, 독재적 정권인가는 갈수록 관찰의 대상이다.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가장 모범적으로 이식했다는 인도의 경우는 어떤가. 미 국무부가 해마다 발표하는 인권실태보고서에서 인도의 후진적 폭력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성과 아동, 타종교 및 타민족에 대한 이 나라의 야만성은 인권을 외교정책의 주요목표, 때로는 수단으로 삼는 미국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유신 방식 개혁을 내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정권, 가까스로 3선 집권에 성공했지만 국제적으로 부도덕한 정권으로 낙인찍힌 페루의 후지모리대통령 등이 선거절차를 거쳤지만 민주적 지도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아니면 우리 가까이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정권 역시 모두가 반대파를 수용하는, 활짝 열린 민주주의체제와는 거리가 있다. 더 가깝게 북한을 이런 잣대로 보자면 도무지 말할 여지가 없어진다.
‘깡패민주주의(Rogue Democracy)’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이 말은 ‘깡패국가(Rogue States)’를 빗대 미국언론이 만들어 낸 신조어이다. 미 국무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 이란 시리아 등 문제국가 6개국에 대한 표현을 ‘우려 대상국(States of Concern)’으로 바꾼 것을 비아냥대는 뉘앙스도 담긴, 새로운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는 국제적 돌출현상들에 대한 미국의 냉소가 반영돼 있음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를 괜한 비아냥이라고 여기기만 한다면 이것 또한 억지이다.
조재용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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