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살의 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더웠다. 학교를 휴학하고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나른함과 권태로움을 이기지못해 전북 김제에서 판소리를 배우는 친구를 따라 그곳 국악원에 놀러가게 되었다. 판소리란 말은 들어봤지만 직접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던 나는 무료함도 달랠겸 산책삼아 나선 것이었다.매미소리만 요란한 대낮의 국악원,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녀들의 노랫소리…. 가까이가서 보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떤 중년여인이 어린 소녀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와 선이 분명한 입술이 젊은 시절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 같은 중년 여인은 그러나 느닷없이 “야, 이년들아, 그것도 소리라고 부르고 자빠졌냐. 니년들 소리 듣고 우는 놈이 있으면 개아들 놈이다”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짜증섞인 얼굴의 중년 여인은 북채를 두드리다 말고 ‘명랑’이라고 적힌 약곽에서 약봉지를 꺼내 입에 탁탁 털어 넣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의 이름은 박보화. 젊었을 때 이름을 날리던 여자 명창으로 어떤 이유에선지 아편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것을 끊지못해 환각 성분이 들어 있는 명랑을 먹는다고 했다.
무엇에 끌렸는지 모르지만 다음날 나는 또 친구를 따라 국악원에 나갔다. 말한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어딘지 슬픈 가락이 묻어있던 여인의 노랫소리는 나의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시내 레코드점에 가서 판소리가 실린 레코드는 있는대로 다 사 몇 달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수십번 수백번을 들었다.
그러다 몇년후 나는 김제의 국악원에 다시 가 보았다. 하지만 박보화씨는 없었다. 아편 중독이 심해져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친구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몸으로 판소리를 부르면서 거리를 헤맸다. 그뒤 나는 박초월명창에게서 직접 판소리를 배우게 되었고 그 덕에 지금은 판소리 흉내라도 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그 시절, 그 여인의 차갑고 그늘진 검은 얼굴과 맑고 고우면서도 구슬픈 목소리,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듯한 눈, 그리고 상스러운 욕설, 쓸쓸하고 적막한 국악원의 분위기, 노을, 소녀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추억들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김명곤 국립극장 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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