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 영주의 전단(專斷)에서 풀려나기 위해 돈과 자치(自治)를 맞바꾼 중세 말기 자유 도시의 시민들에게,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속언은 커다란 실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시대적·수사적 맥락을 넘어서 만약에 그 말이 옳다면, 오늘날 인류의 반 가까이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20세기 초에 1억이 채 되지 않았지만, 지난 세기 말에는 그 수가 25억으로 불었다. 2005년에는 인류의 반이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고, 2025년에는 인류의 3분의 2가, 그리고 22세기초에는 4분의 3이 도시민이 될 것이다.
지난 세기가 시작될 무렵, 500만이 넘는 시민을 보듬고 있는 도시는 지구 위에 런던 하나 뿐이었다. 오늘날에는 인구가 1,000만명이 넘는 도시도 16 군데나 된다.
1998년의 한 조사는 인구를 기준으로 한 세계 5대 도시가 도쿄(2,680만), 상파울루(1,640만), 뉴욕(1,630만), 멕시코 시티(1,550만) 그리고 봄베이(1,510만)라고 보고한 바 있다.
유엔의 예측에 따르면 메갈로폴리스 즉 인구 800만이 넘는 거대도시는 2015년에 33 군데에 이를 것이고, 그 가운데 27개가 개발 도상국에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21세기에도 도시는 계속 그 외연(外緣)을 확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도시의 가장자리가 확장되는 것만이 도시화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지난 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계속될 도시화는 도시의 영역이 확장돼 주변의 농촌지역이 도시적 취락으로 변해 가는 과정 못지 않게, 도시 자체가 보다 도시적인 요소를 더해가는 과정을 포함할 것이다.
그 도시화는 건조물들의 풍경이 바뀌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삶의 내면 풍경이 바뀌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도시화된 사회에서 형성되는 도시적 퍼스낼리티도 이런 변화의 물살을 탈 것이다.
도시는 촌락과 더불어 인간의 2대 거주 형태이다. “신은 촌락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거나 “도시는 얼굴을 갖고 촌락은 영혼을 갖는다”는 격언들은 촌락의 자연성(自然性)에 대조되는 도시의 인위성(人爲性)을 강조하고 있다.
도시 공동체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경쟁과 자기이익 추구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그 관계는 흔히 비인격적이고 타산적이며 일시적이다. 또 빈번한 사회 이동이나 가족·친척·이웃과의 결합 약화 같은 것이 도시적 생활양식의 특징이다.
이런 도시적 인간 관계와 도시적 생활 양식은 표준주의, 개인주의, 심리적 이동성, 물질주의, 세계주의 같은 도시적 퍼스낼리티의 기반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도시적 생활양식, 도시적 퍼스낼리티의 빛깔은 21세기에 더 짙어질 것이다.
전자혁명으로 도시 '공간의미'잃어
무슨 일을 하든 모여있을 필요없어
인터넷연결 불구 개인고립 더 심화
고대 이래 20세기까지 도시의 풍경은 꾸준히 변해 왔다. 그러나 21세기의 도시는 지금까지의 변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 변화를 목격할 것이다. 르네상스나 산업혁명 이상으로 중요한 혁명, 곧 전자 혁명이 지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터넷을 통한 즉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의 공간이 한 마을 정도의 크기로 수축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어 ‘도시(都市)’라는 말에는 왕궁 소재지 곧 정치중심지로서의 도읍(都邑)과 상업 중심지로서의 시장(市場)이라는 의미가 병렬돼 있다.
‘도시(都市)’의 ‘시(市)’가 저자 곧 시장을 의미하듯, 예전의 도시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시장의 공간이었고, 돈이 흘러드는 장소였다. 그 뒤에 도시는 고용의 장소, 곧 탄광과 공장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금융을 비롯한 경제 활동에 더이상 공간적 인접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인터넷이 탄생시킨 ‘사이버 도시’ 한 가운데에 있을 수 있다. 무슨 일을 함께 하기 위해서 굳이 모여 있을 필요는 없다. 공간적 위치의 개념이 중요성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21세기를 도시의 세기라고 할 때, 그 도시의 큰 부분은 사이버 도시가 될 것이다. 시베리아 평원도 도시가 될 수 있고, 태평양 위에 떠 있는 요트도 도시가 될 수 있다.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 교수 매뉴얼 캐스텔즈는 21세기가 겪을 이런 파라독스를 ‘도시가 없는 도시 세계’라고 표현했다. 도시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지구 표면의 구석구석으로 펼쳐지지만, 그 도시의 상당 부분은 현실의 도시가 아니다. 시민과 아스팔트 사이의 연계가 끊어진 이 상황은 역설적으로 ‘도시의 죽음’이라고도 부를 만하다. 도시는 확장되며 사라진다. 미국인들이 ‘스프롤링(sprawling)’이라고 부르는 도시의 이 ‘펼침’ 현상은 현실 세계 속에서도 자동차와 전화 덕분에 이미 지난 세기에 시작된 바 있다.
그 현실 세계 속의 도시도 얼굴이 크게 바뀔 것이다. 중세에 도시의 전략적 지점은 성문(城門)이었다. 그 뒤로 그 지점은 항구로 옮아갔고, 뒤이어는 역(驛)으로 옮아갔다. 앞으로 도시는 공항이나 거대한 환승역 따위의 또다른 전략적 지점 주위에 형성될 것이다.
정보의 전달이나 교환과 관련된 활동 들의 대부분이 거리의 공간에서 사라져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갈 것이므로, 우체국이나 도서관은 역사적 기념물이나 관광 명소로 변할 것이다. 전자 우편 주소를 가진 사람들은 이미 수두룩하고, 개인 홈페이지를 가진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소포를 보내는 데도 사람들은 이미 우체국보다는 퀵서비스를 더 선호한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자기 교육을 학생들이 선호하게 되면 대학의 규모도 크게 축소될 것이다. 원거리 구매 곧 홈쇼핑의 확산으로 상점 수도 줄어들 것이다. 자기 방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 유목(遊牧)이라는 말을 21세기의 키워드로 삼는 미래학자들의 일반적 예측과는 달리, 유목에서 정주(定住)로의 역이행(逆移行)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 재택 근무의 확산을 억제할 가능성도 있다. 사람들은 재택 근무든 현장 근무든 자신들의 기호에 맞게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현실 속의 쇼핑이라는 ‘육체적’ 행위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상점들도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할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유대는 지금보다 더 엷어질 것이다. 지금의 거대 도시들이 한쪽 부모만 있는 결손 가정을 낳고 있듯이, 가상 공간 속의 사이버 도시는 사회 해체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연결돼 있으면서도 고립돼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폴 비릴리오가 지적했듯, 사회의 가장 커다란 균열은 자기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디에라도 있을 수 있는 ‘정주민’과, 어디에도 접속되지 못하는 기술적 노숙자로서의 ‘유목민’ 사이에서 생길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부유함 속에서 편재(遍在)하는 붙박이와, 가난 속에서 편재(偏在)하는 떠돌이 사이의 역설적인 균열이다. 도시가 사이버 공간 속에 녹아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파편화한 개인들을 묶을 수 있는 새로운 연대의 모색이 필요하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현대 유럽어에서 ‘도시’와 관련된 형용사나 추상명사들은 ‘세련됨’ ‘우아함’ ‘예절바름’, 또는 ‘문명’이라는 비유적 의미를 지닌다. 그 말들은 ‘도시’를 뜻하는 라틴어 우르브스(urbs)와 키비타스(civitas)에 어원적으로 연결돼 있다.
라틴어 urbs는 일차적으로 ‘도시’를 뜻했지만, 그 시절의 ‘도시 중의 도시’인 로마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 urbs의 형용사가 urbanus다. 영어의 urban과 urbane은 둘 다 라틴어 urbanus를 차용한 말인데, urban이 중립적으로 그저 ‘도시와 관련된’이라는 뜻이라면, urbane은 ‘우아한’ ‘세련된’‘정중한’이라는 긍정적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말들의 기원이 된 라틴어 urbanus 자체가 ‘도시와 관련된’이라는 일차적 뜻 외에 ‘공손한’ ‘우아한’이라는 비유적 뜻을 겸하고 있었다. 영어 urban의 형용사 urbanity는 ‘도회지풍’이라는 일차적 뜻보다는 ‘우아함’ ‘세련됨’ 같은 비유적 의미로 더 자주 쓰이고, 그것의 복수형 urbanities는 ‘예절’ ‘정중함’ 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라틴어에서 urbs와 동의어였던 civitas는 ‘도시’라는 뜻 외에 ‘시민의 조건’ ‘시민의 권리’라는 추상적 뜻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 영어 city는 이 civitas가 프랑스어를 거쳐서 차용된 것이다.
이 civitas는 ‘시민’이라는 의미의 키비스(civis)에서 파생한 말이고, 이 civis의 형용사 곧 ‘시민과 관련된’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는 키비쿠스(civicus)와 키빌리스(civilis)였다.
‘시민의’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 형용사 civil과 civic은 바로 이 라틴어 형용사 civilis와 civicus가 차용된 것이다. 영어 civil과 civic은 그 파생어나 복합어에서 이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 의미를 여실히 드러낸다.
예컨대 civil의 명사형 civility는 urbanities와 마찬가지로 ‘예절’ ‘정중함’을 뜻하고, civic이 만들어낸 복합형용사 civic-minded는 ‘공공심이 있는’ ‘시민적 양식을 지닌’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시민으로 만들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지닌 civilize와 그 명사형인 civilization이 각각 ‘개화하다, 문명화하다’, ‘개화, 문명(화)’를 뜻하게 된 것도 서양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부여한 긍정적·근대적 가치를 드러낸다. 요컨대 도시는 문명이다. 낭만주의자 루소가 “도시는 인류의 가래침”(‘에밀’)이라고 말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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