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이 그룹의 진로에 관한 중대한 약속을 내외에 천명한 것은 지난달 31일의 일이다. 정주영명예회장을 비롯한 몽구 몽헌회장 등 창업자 일가가 모두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그룹도 사실상 해체해 계열사별로 독자운영해 나가겠다는 내용이다. 정리수순의 하나로 우선 6월중 자동차 부문에 대한 소그룹 계열분리를 매듭짓겠다는 내용도 분명히 강조됐다. 일반 국민과 투자자들은 “왕회장 다운 화끈한 결단“이라고 환영했다. 국민기업이나 다름없는 현대그룹의 계열사들이 동반몰사를 면하는 방도는 그것 밖에 없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이후 한달이 지났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정 명예회장은 계열사 지분을 상당부분 정리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무실을 유지한 채 사실상의 섭정으로 ‘군림’하고 있다. 몽구회장은 자동차 계열 회장직을 양도하기는 커녕 경영권을 더욱 단단히 쥐기 위한 안전조치들을 쌓아나가고 있다. 몽헌회장도 관계사들의 회장 타이틀은 내놓았다고 하지만 그룹의 전략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현대아산의 이사회 의장직을 새로 꿰차 명실상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결국 대 국민 약속의 핵심인 ‘3부자 동시퇴진’부터 유야무야되고 있는 형국이다.
계열분리작업도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시키고 있어 그 저의를 의심하게 한다. 약속대로라면 오늘까지가 계열분리 시한이다. 현대자동차에 대한 정 명예회장 주식지분을 관련법규에 맞춰 축소하고 자동차부문을 그룹에서 떼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측은 이와 반대로 정 명예회장의 지분을 크게 늘려, 계열분리를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선 실정법상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역(逆)분리’안을 당국에 제출했다가 퇴짜 당하고 이를 철회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이고 있다.
자본금·매출액 등 어느모로 보나 덩치가 훨씬 큰 중핵기업들을 모아 ‘위성그룹’으로 먼저 떼어 내겠다는 희한한 발상에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이것이 만약 항간의 분석대로 몽구회장측에 대한 몽헌회장측의 견제포석이라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한달 전의 대국민 약속은 완전히 허구였고 시장의 반응이나 경영의 위기여부와 상관없이 ‘혈육간 상쟁’이 계속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공언한 약속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지켜져야 한다. 대내외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 만이 현대가 생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일부 계열사들은 여전히 자금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분으로 그룹이 혼란한 와중에 현대자동차의 최대주주는 다임러크라이슬러가 됐다. 경영난맥상이 길어질 경우 자칫 외국자본에 의한 인수합병 제물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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