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을 기다려왔다.”마치 3차 개방의 시기와 폭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일본 상업영화들이 줄줄이 국내상영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4월 1일 국내 개봉한 일본영화‘엑기(역)’는 무려 45분을 잘라냈다. 이유는 하나. 연소자 관람가 등급을 받아야만 국내 상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15세관람가’만 받으면 된다. 1차 개방 때에 사놓고 초초하게 기다려온 애니메이션(국제영화제 수상작으로 제한)까지 상영이 가능해짐에 따라 일본영화의 국내 상영은 그 규모와 흥행에서 폭발적인 증가를 보일 전망이다.
1998년 10월 1차 개방(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으로 상영된 일본 영화는 불과 4편. 시장 점유율이라고 해야 불과 0.7% 였다. 그래서 “별 것 아니잖아”라는 섣부른 판단도 나왔다.
그러나 연소자 관람가와 70대 영화제 수상작으로 확대한 2차 개방(지난해 9월)후 그 양상은 달라졌다.
올 상반기까지 12편이나 개봉했고, 시장점유율도 11.6%로 급상승했다. 작품당 평균 관객 역시 9만8,000여명으로 한국영화를 앞질러 버렸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 레터’의 경우 서울에서만 67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 32편이나 개봉한 한국 영화로 ‘반칙왕’(81만명)이 유일하게 이를 앞질렀다. ‘사무라이 픽션’과 ‘쉘 위 댄스’도 25만명을 기록했다.
결국 예술성 높은 작품, 과거 작품보다는 상업성이 강한, 최근 작들이 한국시장에 먹힌다는 증거. 여기에 애니메이션까지 가세하면 일본 영화의 한국시장 점유율은 그들의 장담대로 2년 만에 15%는 쉽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번 개방 확대로 묶여있던 일본 블록버스터들과 마니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유명 애니메이션들이 올 하반기에 모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당장 7월 22일이면 일본에서 전편을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한‘링 2’가 개봉된다.
‘춤추는 대수사선’도 29일이면 선을 보인다. 일본에서 14개월간 롱런하며 700만명을 동원한 작품. 이어 8월에는 ‘고질라 2000’ ‘사국’이 개봉한다.
‘올빼미의 성’과 일본에서 8월 12일 개봉하는 최신작 ‘화이트 아웃’도 추석프로로 준비 중이다. 둘 다 거대한 액션과 오락이 가미된 블록버스터.
‘자살관광버스’ ‘총알발레’ ‘키즈 리턴’도 이미 오래 전에 수입해 놓았다. 모두 2차개방 때까지는 국내 상영이 불가능했던 상업성 높은 작품들이다.
일본직배사 형태의 배급사도 벌써 생겼다. 3월 31일 설립한 UGA코퍼레이션은 오사카 유선방송등 100% 일본 자본이며 사장도 일본인. 이미 시리즈물을 포함 수십편의 일본 영화를 확보하고 9월부터 국내에 배급을 시작할 계획이다.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만만찮다. 정부가 상영가능(국제영화제 수상작)으로 발표한 작품은 25편. 그 중 1980년대 이전에 제작된 15편을 제외한, 전문가들이 상업성이 있을 것으로 분석한 10여편 역시 이미 수입된 상태. 미아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타카하타 이사오의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등 5편을 수입해 놓은 대원동화 황정열 실장은 “차분히 계획을 세워 가을부터 국내 상영을 시작하겠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상의 흥행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 영화의 개방 확대로 가장 위기감을 느끼는 쪽은 한국영화. 예상을 깨고 극장용 애니메이션까지 들어오면서 장기적으로는 기술교류 합작이 확대되겠지만, 한국 영화로는 당장 미국 할리우드와 일본 양쪽과 싸워야 할 어려운 입장이다.
더구나 지난 해와 달리 한국영화가 규모는 커졌지만 내용이 부실해 실망한 관객들이 일본 영화쪽으로 몰려갈 가능성도 높다.
1차 개방 때 나타났던 수입과당 경쟁도 재연될 조짐이다. ‘18세 관람가’는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제외하고는 묶어 놓았고, 영상물등급위원회 역시 ‘우리가 일본 저질 포르노까지 볼 이유가 없다”며 일본영화의 경우 심의를 엄격히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저질영화의 유입도 우려된다.
‘거짓말’과 ‘감각의 제국’의 상영허가로 다소 완화된 심의기준을 악용해 적당히 잘라내고 ‘15세미만 관람가’를 받으려는 영화들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관람등급을 고려하지 않고 수입은 허가하고, 등급심의에서 국내상영(15세 미만 관람가 까지)여부를 결정하는 제도적 모순이 가져올 마찰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방송-케이블TV, 日프로로 대체
방송까지 빗장이 열였다. 방송 매체구분없이 스포츠, 다큐멘터리, 보도 프로그램이 개방됐고 케이블 TV와 위성방송에선 국내 개봉된 일본영화를 방송할 수 있게 됐다.
현재 일본에는 NHK를 포함한 120여개의 지상파 방송, 와우 와우등 200여개 이상의 위성채널, 그리고 200여개의 케이블TV업자들이 다양한 다큐멘터리 보도 스포츠와 관련된 각종 프로그램을 양산하고 있다.
이번 개방으로 오래전부터 교양·문화 다큐멘터리의 세계화 전략을 수립, 실행해오고 있는 NHK등 일본 방송사들은 한국시장을 적극 공략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문화가 개방된 아시아 각국에 미국 수출가의 10분의 1수준의 낮은 가격에 프로그램을 판매하는 전략을 한국에도 구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럴 경우 방송사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 프로덕션사의 시스템과 산업기반 약화가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방송가에선 이번 방송 개방에 대해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일본 다큐멘터리가 방송 개방에 포함된 것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환경이 열악한데다 제작 기술이 일본에 비해 떨어져 일본 다큐멘터리가 경쟁력 있기 때문이다.
KBS 등 지상파 방송사에선 당장 일본 프로그램 수입·방송하는 것에 대한 계획은 없다. 하지만 일부 방송사에서 일본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시각도 적지않다.
특히 프로그램을 60-80%정도 외부 프로덕션에 의뢰해 제작방송하고 있는 케이블TV는 시장성있는 일본 프로그램을 조만간 방송할 것으로 보인다.
케이블TV 업계 관계자는 “콘텐츠가 부족한 상황에서 케이블TV들이 국내 관객에게 인기가 높았던 일본 영화의 방송도 서두를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일본 프로그램의 무차별 유입을 막기 위해서는 열악한 프로덕션사와 방송사들의 경쟁력 약화에 대한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보도물과 다큐멘터리 형식을 가장한 저질 프로그램 범람으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KBS 장해랑 PD는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저질 일본 프로그램 방송이 잦을수록 우리의 정서에 문제를 야기시킬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방송 프로그램 개방으로 방송의 질적 향상을 기할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견해도 제기하고 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가요-아이돌 그룹 "화려한 무대 앞세워 진출"
일본 대중 가요가 들어오는 상당수 문이 열리기는 했으나 ‘일본어 가창 음반’의 대문이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상태에서 현재 유명 뮤지션들은 중국어나 영어로 부른 음반 출시를 준비 중이다.
따라서 80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 최고의 아이돌 스타인 우타타 히카루가 뉴욕에서 거주하며 쌓은 완벽한 영어 가창 실력을 바탕으로 이번 개방의 최대 수혜자가 될 전망이다. 현재 업계에선 2002년께 일본어 가창 음반까지도 개방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 혼성 3인조 ‘드림스 컴 트루’의 영어 음반, 비주얼 록 그룹 ‘라캉 시엘’의 영어 트랙 만을 모은 컴필레이션 등이 준비 중이다. 밀리언셀러 그룹인 퍼피의 중국어 음반, 아무로 나미에 프로듀서인 테츠야 코모토가 제작한 ‘링’ 등이 이미 중국어 권에서 성공한 전력을 바탕으로 한국시장을 공략한다.
대형 야외공연장이 완전 개방됨에 따라 일본 비주얼 록그룹이나 아이돌 그룹의 진출을 부추길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추진 중인 공연 모두 화려한 무대 연출을 앞세운 아티스트 중심. 우타타 히카루, 라캉시엘, 글레이 등 굵직한 아티스트의 공연 교섭도 진행 중이다. 라캉시엘의 경우 국내에서 상당수의 팬클럽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이들이 대규모 무대에 설 경우 파급효과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번 개방은 일본 음반 기획 및 공연 기획사의 합작형태의 진출을 촉발하는 한편 한국 가수의 일본 진출도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소니는 가수 ‘소냐’를 8월 니가타 서머페스티벌에 참가시킨 후 음반을 낼 예정이다. 빅터 엔터테인먼트. 에이벡스 트랙스 등도 한국 측 합작 파트너의 최종 낙점을 앞두고 있다.
소니뮤직코리아의 일본음악담당 이혁씨는 “일본 음반사들이 국내 인지도가 높은 아티스트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측 합작파트너와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 우리 가수의 일본 진출도 주선할 것으로 점쳐진다”고 밝혔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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