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가르친 '허준'과 방송의 역할전도“선생님, 홍춘의(최란)는 왜 안들어가요?”
초등학교 3학년 교실.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여성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아이들은 벌떼같이 항의했다. 그들에게 드라마‘허준’에서 여성으로는 최고 자리에 오른 내의녀 홍춘의는 분명 위인이었다.
위인전에서 신사임당 유관순이나 읽었던 아이들로서는 몰랐던 인물을 드라마가 가르쳐준 셈이다. “허준 안보면 다음날 학교에서‘왕따’를 당한다”며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아이들은 드라마를 봤다.
‘허준’(밤 9시50분)은 ‘어린이 시청시간대’(오후5시-7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 20일 허준이 2회연속으로 방영될 때, 한 학부모의 말대로 ‘그 시간까지 공부를 시켰으면 도저히 못견뎠을’ 어린이들이 밤 12시까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허준의 자기희생적이고 숭고한 모습이 어느 위인전보다 어린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도, 많은 어린이들이 역사책을 펴놓고 등장인물과 사건을 하나하나 확인하거나 아버지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며 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사극을 통한 공부는 이들 드라마가 역사의 실체를 극적으로 잘 담아내기 때문이다.
TV영상은 이렇게 교육적이다. 그런 만큼 비할 데 없이 위험하기도 하다. 굳이 ‘수퍼맨’을 흉내내다 추락사한 옛날 어린이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작 어린이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요즘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위험 그 자체를 가르치고 있다.
정면충돌 교통사고 등 어른이 보기에도 참혹한 화면으로 도배된 MBC‘TV특종 놀라운 세상’(토요일 오후 6시),‘인간 게놈프로젝트’라는 미명하에 키를 잡아늘리기에 여념이 없는 SBS‘뷰티풀라이프’(일요일 오후 6시 30분), 맨손으로 유리컵을 내리치는 사술을 부리며 “어린이들은 절대 따라하지 말라”고 해 충동심을 자극하는 KBS ‘수퍼TV 일요일은 즐거워’의‘기고만장’(일요일 오후 7시)등. 이런 프로그램들이야 말로 ‘19세 이하 시청금지’딱지를 붙여 ‘허준’방영 시간대로 옮기는 것이 제대로 된 편성이 아닐까.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들에 정작 어린이들은 관심이 없다’요즘 방송가의 고민에 ‘허준 신드롬’이 그 답을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나오고, 안 나오고가 아니다. 좋은 어른 드라마는 가르치고, 유치하고 자극적인 10대 겨냥의 오락프로는 아이들을 망치는 역할의 뒤바뀜. 우리 방송의 모순이자 현실이다.
양은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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