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글속에 숨은그림 담기"“소설은 숨은 그림을 찾아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숨은 그림을 담아두는 것이어야 한다.”
소설가 이윤기(53)씨가 세번째 창작집 ‘두물머리’(민음사 발행)를 묶어냈다. 소설은 숨은 그림찾기라는 그의 말처럼, 짧고 긴 13편의 소설이 실린 ‘두물머리’는 우리 인생의 숨은 그림들을 보여주는 화첩같다.
이씨가 그린 그림은 동양화들이다. 그것도 먹을 듬뿍 묻힌 굵은 붓으로 툭, 툭 찍어 그린듯한 선 굵은 수묵화. 그림에는 독자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기교나, 머리 아픈 추상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산수(山水)를 몇 가닥 선으로 그려내듯, ‘모듬살이’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모습들을 그는 담박한 필치로 그려낸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코 그림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숨은 그림을 만나게 된다. 이씨가 숨겨놓은 숨은 그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 말의 아름다운 무늬’요, 다른 하나는 ‘삶을 보는 지혜로운 시선’이다.
표제작 ‘두물머리’는 그 무늬와 시선이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작품이다. 두물머리는 양수리(兩水里)다. 두 갈래의 큰 물,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서 옛부터 두물머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은 땅이었지만 지금은 양수리라는 멋없는 지명으로 불린다.
이 아름다운 곳이 또 언제부턴가는 러브 호텔이라는 볼썽사나운 것들로 흉측해졌다.
소설의 화자가 이곳을 찾아간다. 고향 친구의 아버지를 30년만에 뵈러 가는 길이다. 그 친구는 2년 전에 미국에서 죽었다. 그러나 친구의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충격을 줄까봐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당신이 모르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화자에게도 아버지에게 아들의 죽음을 숨겨줄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귀머거리 행세를 하던 여든 노인인 아버지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들들은 숨기고, 아버지는 또 그 사실을 짐짓 모른 체하고…. 우리 인생의 두물머리다.
단편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화자는 이번에는 가물섬이라는 곳으로 간다. 한자어로는 검을 현(玄) 자를 쓰는 현사도(玄蛇島). 어머니를 잃고 그 시름을 달래기 위해 등대지기를 취재하러 항해표지선에 편승한 기자.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한번 보아라”는 일가 어른들의 말을 뒤로 하고 어머니의 육신을 염(殮)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가물섬에서 그 생명의 원초, 노자가 말한 현빈(玄牝·현묘한 암컷)을 본다. ‘사람이 어디에서 기운을 퍼오는지’를 깨닫는 과정이 소설의 흐름이다.
이씨는 깨달음이되 그 길을 드러내지 않고, 에로티시즘이되 노골적이지 않은 그만의 어법으로 한 편의 질박한 그림을 이 작품에서 그려보여 준다.
잊혀져가는 우리 말의 멋과 맛을 되새겨보는 것도 이씨의 소설을 읽는 큰 즐거움이다. 죽담, 장귀틀, 토시, 곤쟁이, 놉, 독살, 수양딸로 며느리 삼기 등. “소설은 결코 황성 옛터가 아니다”는 것이 이씨의 자신있는 소설 쓰기의 변이다. 이번 소설집은 그 옛터에 새로 선 멋드러진 광탑(光塔)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