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평생 잊지못할일] 한국전쟁때 나에게 숙식온정 모녀에게 보답나는 10대 중반에 가출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부산에 임시수도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피난지를 찾아다니느라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린 내게 전통적 교육만 시키고 신식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 신학문을 익히려 아버지 몰래 집을 나왔던 것이다.
숙식을 해결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맨 끝에 부산의 한 고아원에 들어갔다. 어렵사리 야간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낮에는 일만 시키고 밤에도 불침번을 맡겨 공부할 틈이 없었다. 틈을 내 공부하려면 다른 원아들이 책을 집어던지는 따위로 방해해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공부하기 편한 곳을 찾아 이곳을 나오기로 했다. 그때 서울은 수복은 됐으나 정식 환도가 되지않아 도강증(渡江證)이 있어야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래서 흘러간 곳이 마산. 고아원이나 이발소 같은 곳을 기웃거리며 거처를 찾아 헤맸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한창 자랄 나이인데도 얼굴은 누렇게 떴고 이빨만 튀어나와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작은 키에 몸은 대꼬창이처럼 말랐다. 책보를 낀 모습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거지였다.
시청 앞에서 밤을 지샐 생각이었다. 해가 뜨면 무슨 방법이 생길테지. 늦은 봄 밤기운은 오한을 들게했고 몇 끼를 굶었는지 배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들렸다. 책보를 안고 머리는 두발 사이에 처박은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그때 어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러고 있니, 집이 어디냐, 밥은 먹었느냐 같은 말을 걸었으나 나는 대꾸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일어나라 고 한 뒤 시청서 멀지 않은 집으로 데려갔다. 고아원에서 몇 걸음 떨어진 집으로 기억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로부터 사정을 들은 뒤 부엌에서 밥을 차려 내왔다. 내가 잠잘 이불은 그녀 어머니 옆에 깔아주었다. 다음날 아침 김치와 된장같은 반찬에 하얀 쌀밥을 얻어 먹었다. 어머니는 아침 밥상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이 어린양을 잘 돌봐달라는 말들이 기억에 떠오른다.
아침에 출근 차림을 보니 그녀는 간호장교였다. 약간 뚱뚱한 몸매였으나 처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아이가 지낼 곳을 알아보라고 딸에게 일렀고 그녀는 낮에 시청 앞에서 만나자고 말하고 출근했다. 나는 이 착한 모녀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였는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험한 세상에 거지같은 아이를 한 방에 재워주고 따뜻한 밥도 먹여준 모녀. 지금 50년쯤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들 모녀를 만날 수 있다면 우리 집에서 편안히 재워드리고 두끼의 밥도 정성껏 대접하고 싶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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