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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21] (31) 유토피아적 '진보의 이상'은 추상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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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21] (31) 유토피아적 '진보의 이상'은 추상일뿐

입력
2000.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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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유토피아와의 결별--희망의 원리에서 책임의 원리로인류가 막 페이지를 넘긴 20세기는 혁명의 세기였고, 폭력의 세기였다. 혁명과 폭력은 따로 서지 않았다. 그 둘은 가슴을 맞대고 서로 스며들어가며, 상대방 안에서 자신을 구현하며, 지난 세기를 잔혹한 격동기로 만들었다.

그 격동의 커다란 이념적 밑받침 가운데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라는 대서사(大敍事)였다. 그 대서사의 구호는 진보였고, 그것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총사령부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그 진보는 사회적 진보일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의 진보이기도 했다. 진보의 열정은 성찰의 브레이크를 날려보내며, 인류를 앞으로, 앞으로 밀어붙였다. 그 진보의 역사(役事)는 1989년 베를린에서 붕괴의 굉음을 들었다. 질주가 멈추고 나침반이 사라지면서, 이념의 혼돈과 윤리의 공백이 그 뒤를 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10년 전에 독일의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리’(1979)를 출간했다. 이 책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하고 쓰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나스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모든 진보적 기획들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며 일종의 반-유토피아주의를 선언했다.

진보의 열정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책임의 원리’는 사회주의만이 아니라 먹성좋은 약탈 자본주의, 수렵 자본주의까지도 겨냥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잔혹한 격동기로서의 20세기를 마감한 인류가 새로운 세기의 윤리를 모색하고 마련하는 데 한 참조틀로 소용될 법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그리는 기획은 웅장하다. 그 기획은 날로 가속화하는 과학의 진보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며 만들어낸 ‘윤리적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요나스에 따르면 이 기획은 우리가 진보의 이상과 과감히 절연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도덕적·사회적·역사적 유토피아와 절연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는가? 우리의 선택이 극히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요나스에 따르면 이제 우리 인류가 어떤 미래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도대체 인류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미래가 존속하기를 원하기는 하느냐의 여부다.

인류의 힘은 진보의 열정에 실려 팽창을 거듭해서 이제 우리들의 종(種)을 수백번이라도 몰살할 수 있을 만큼 커졌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모든 미래의 인류에 대한 책임, 바스러질 듯한 이 행성의 미래에 대한 책임이 우리들의 어깨 위에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나스는 말한다.

사회적·과학적 진보를 목표로 찬양돼 온 ‘희망의 원리’는 이제 ‘책임의 원리’에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같은 제목의 책으로 ‘희망의 원리’라는 말을 유명하게 만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줄곧 반스탈린주의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나스가 비판하는 것은 스탈린식으로 경화(硬化)된 진보 이념만이 아니라, 진보라는 미망(迷妄) 그 자체다.

실제로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1954)에 대한 비판적 답변으로 쓰여졌다. ‘희망의 원리’의 반대명제로서의 ‘책임의 원리’는 블로흐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 유토피아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블로흐가 보기에, 유토피아는 인간의 의식의 본질적 구성 부분이다. 인간은 자신을 미래에 투사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아직’ 자신의 진정한 형태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이 블로흐의 생각이었다. 기독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는 위대한 역사적 기획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불의에 반항하고 구원을 희망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의 진보를 모색하도록 부추긴 것은 이런 ‘미래 속으로의 자신의 투사’라는 희망의 원리였다.

그리고 이런 희망의 원리는 베이컨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를 구상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원리였다.

요나스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휴머니즘이다. 요나스가 보기에 블로흐나 다른 모든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꿈꾸었던 고딕체의 인간, 즉 ‘진정’하고 ‘총체적’이며 자기 자신과 ‘조화된’ 이 ‘인간’은 단지 하나의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환원적이고 일의적(一義的)인 인간은 인류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이다. 요나스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다의적인 존재이고, 선과 악 사이에서 환원불가능하게 분열된 존재이며, 자신의 존재 자체에 내재한 불행과 고통과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 기쁠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지만 우리가 존중하고 복종해야 할 진리는 ‘진정한 인간’이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 진정한 인간은 그 자신의 귀함과 천함, 위대함과 비참함, 행복과 고통, 정당함과 죄업, 요컨대 그 자신의 이 모든 양가성(兩價性)과 분리할 수 없다“고 쓴다. 요컨대 양가성은 요나스가 보기에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의 그 본질적 양가성을 무시한 채 야심차게 기획된 사회적 유토피아들은 역사를 피와 고통으로 물들였다. 앞으로 언젠가 올 ‘진정한 인간’과 아직 그 진정성에 이르지 못한 현재의 인간을 대립시키는 메시아주의가 그 유토피아 구상의 바탕이었다. 요나스는 그 메시아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미래는 완전무결한 새로운 인류의 분만(分娩)은커녕 지금 생겨먹은 대로의 인류를 보전하는 것도 힘겨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테크노사이언스는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자연 정복욕과 결합해, 다가올 세대들의 생존 조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최선을 바랄 수 없다. 인간이 고작 바랄 수 있는 것은 최악을 피하는 것이다. 요나스의 윤리는 결국 소극주의의 윤리라고 할 만하다.

요나스의 그 소극주의 윤리는 미래의 인류에 대한 절대적 ‘책임’의 원리에 기반한 ‘미래의 윤리’다. “인류는 자살할 권리가 없다”고 요나스는 말한다.

다시 말해 인류에게는 자신의 후손 곧 미래의 인류에게서 생명의 기회를 박탈할 권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들이 미래에 대해 져야 할 이 집단적 책임의 개념은 요나스로 하여금 그가 ‘공포의 발견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안하게 한다.

공포의 발견학이란 우리의 실천을 책임 원리의 방향으로 더 잘 인도하기 위해서, 위협 자체의 예견(곧 공포)을 통해 우리들의 의무를 자각하는 것이다. 요나스가 보기에 그 공포는 우리들이 미래 세대에게 지고 있는 책임의 본질적 부분이다.

이제 우리들의 책임이나 의무에 대한 성찰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행성 전체를 포함해야 한다고 요나스는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취약함은 지구 자체의 취약함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류라는 종을 소멸의 문턱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자연에 대한 기술의 경멸, 곧 자연을 굴종시킴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유토피아적 의지다.

그래서 요나스는 자연에게도 어떤 도덕적 위엄과 존중받을 권리를 인정해주자고 제안한다.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결국 생태론의 철학적 표현인 셈이다.

편집위원 고종석

aromachi@hk.co.kr

■'책임의 원리' 한스 요나스

후설·하이데거에 수학

'책임원리'로 獨평화상 수상

한스 요나스(1903-1993)는 독일에서 태어나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운 뒤, 종교 철학자 루돌프 불트만 밑에서 초기 기독교 시대의 그노시스파 운동 곧 영지주의(靈知主義) 운동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그노시스파는 1-2세기의 헬레니즘 시대에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의 신비주의적 이단 분파다.

이들은 영(靈)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대립시킨 뒤, 그리스도가 취한 육신은 참 육신이 아니라 허울이었을 뿐이라는 주장, 곧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設:Docetism)을 내세웠다.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영(靈)의 힘으로 육체를 벗어나 영화(靈化)됨으로써 이뤄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유태인이었던 요나스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1933년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예루살렘에서 가르쳤고, 제 2 차세계대전때는 영국군으로 참전한 뒤 전승국의 군복을 입고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1949년에 캐나다로 이주했고, 그 뒤 뉴욕에 정착해 1955년부터 1976년까지 뉴욕 사회조사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한나 아렌트가 그의 절친한 동료였다. 그 뒤에는 뮌헨 대학에서 가르쳤다.

‘책임 원리’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1987년에 독일 서적상들이 수여하는 ‘평화상’을 받았다. ‘책임의 원리’외에 그의 또다른 대표작으로는 이 책에서의 주장을 신학에 적용해 인간의 책임 아래 위치한 신의 개념을 구상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의 개념’(1984)이 있다.

이 책에서 요나스는 전통적으로 신의 세 가지 속성으로 지적돼온 지선(至善), 전능, 인식 가능성 가운데 전능을 부인했다.

신이 지선하면서 동시에 전능하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것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신은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다.

신은 둘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요나스는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에게 선함의 속성을 그대로 놓아두고 그에게서 전능의 속성을 박탈했다.

요나스에 따르면, 생성의 세계 안에 자신을 몽땅 바친 신은 이제 인간에게 더 제공할 것이 없다. 이제는 인간이 신에게 무엇인가를 줄 차례다.

즉 이제는 인간이 신에 대하여 일종의 보호자이자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이 요나스의 결론이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그의 어머니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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