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55년만의 남북정상회담과 그 산물인 6.15선언은 세기의 뉴스였다. 두 정상의 파격적인 만남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고 당사자인 우리 국민은 충격과 흥분, 감동, 혼란이 뒤섞인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려야 했다.정상회담 후 남북 양쪽에서 일고 있는 거센 변화의 바람과 간단없이 추진되고 있는 후속조치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6.15선언이 그야말로 선언에 그쳤던 과거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정부나 국민들이 일종의 흥분상태로 들떠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한반도를 뜨겁게 달군 13-15일 두 정상의 만남을 보고 어찌 흥분하지 않고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장 남북이 화해·협력의 시대를 열어 이산가족 재회와 통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온 국민들의 열망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55년간 분단되었고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을 안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그만큼 풀고 헤쳐가야 할 난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이 난제들은 결코 한꺼번에 풀 수 없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벌써 한반도를 바라보는 주변국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겉으로는 남북간의 관계변화를 환영하고 있지만 내심은 다르다. 통일보다는 영향력의 변화, 주도권의 향방이 그들의 관심사다. 다른 서방국가들도 겉으로는 북한판 페레스트로이카의 전조가 되기를 바라는 듯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한 고르바초프의 정책이 소련체제 붕괴를 가속화시켰다고 보는 북한이 과연 페레스트로이카의 길을 갈 것인가 의심하고 있다.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한 것도 위기탈출을 위한 ‘숨고르기’, 즉 페레디슈카(Peredyshka)로 보는 시각도 있다. 주변국들의 이런 우려는 우리의 서두르는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관계에는 불확실성, 돌발성의 요인이 너무 많다. 우리 내부에서부터 이견이 없지 않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무대를 통해 극적으로 등장, 결코 씻을 수 없는 과거를 잊게 하며 면죄부를 챙기는 쇼를 연출했다는 시각도 있고, 애써 말을 아끼며 김위원장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기회를 제공한 김대중대통령이 들러리를 섰다고 폄하는 소리도 들린다.
북한에 대해서도 무리하게 개방·개혁을 요구할 계제가 아니다. 55년간 다져진 북의 체제가 하루아침에 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저들에게도 인민을 설득하고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펼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북한에 다녀온 일부 인사들의 공명심에 들뜬 듯한 언행은 백해무익하다. 정부는 국민들의 통일 염원에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보다 냉정하고 신중해져야 한다.
히말라야의 고봉을 오를 때는 중간 중간에 캠프를 치고 서서히 고도에 적응해가면서 정상으로 다가간다. 이런 적응과정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오르다간 고통을 이기지 못해 중도 포기하거나 참변을 당하게 된다. 우리에게 남북문제는 히말라야 등반과 다를 바가 없다.
이제 정부나 국민 모두 북한 신드롬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갈 때다. 남북정상회담이 획기적인 남북관계 변화의 계기가 되고 6.15선언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으려면 정부나 국민 모두 흥분에서 깨어나 차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경제가 힘차게 돌아가고 사회가 안정되어야 6.15선언의 후속조치들을 착실히 추진할 수 있다. 지금처럼 경제가 망가지고 의료대란, 노사갈등 같은 사회불안요인을 안고서는 모처럼 잡은 남북간의 새로운 화해·협력의 기회를 살릴 수 없다. 은근한 불로 한약을 달이듯 인내와 시간을 갖고 차근 차근 얽힌 매듭을 풀어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탄탄한 일상만이 통일의 바퀴를 굴릴 수 있다.
편집국 부국장 방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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