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된 뒤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남북한이 가까워지는 것을 주변국가들이 싫어한다는 추측성 보도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점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외교다운 외교를 해본 적이 없기에 누적되어온 피해의식의 반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정치가 그렇듯이 외교라는 것도 가능성의 예술이고 안될 것 같은 일들을 되게 만드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세계사의 대세인 탈냉전을 늦었지만 우리가 주도해서 한반도에 정착시켜 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냉전적 고정관념에서 본다면 안될 일이 이미 된 것이고, 앞으로도 안될 일을 해내겠다는 것이 정상회담 이후 외교의 본질이다.
정상회담 이후 주변4국 외교의 중요한 핵심은 대미관계다. 1993년 북한 핵 위기가 시작된 이후 한국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주변적인 위치로 전락했다. 북한의 의도적인 한국 배제전략과 핵이나 미사일 위기의 국제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정상회담으로 북한은 한국 정부를 대화상대로 인정했다. 그리고 핵이나 미사일 개발이라는 정책수단이 북한에 주는 효용가치가 상당히 감소했다. 그 결과 한국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과 북한간에 형성되어있는 교착상태를 타결해줄 적극적인 위상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미국에게 북한의 경제문제를 푸는 것이 대량살상무기라는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를 푸는 핵심임을 설득해야 한다. 그동안의 전략적 접근이라는 대증요법의 양약(洋藥)처방에 더하여 이제 기능적, 경제적 접근이라는 원인요법의 한약(漢藥) 처방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점을 알려야 한다. 특히 공화당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의 강경론자들을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북한에 대해서는 핵이나 미사일 같은 정책수단에 더 이상 집착하면 오히려 북한에 해가 될 것임을 설득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일본에 대해서도 대북 경제지원이 갖는 안보적 효과를 강조하고 북에 대해서는 미사일, 납치범 문제 등 일본과의 현안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대미·대일 수교, 국제경제기구 가입, 대북 경제제재 해제 및 경제지원 등 여러 현안의 해결을 주도해야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미, 일처럼 북한에 대해 대규모의 경제 지원을 하거나 국제사회에 북한을 진입시킬 적극적 수단을 갖고 있지는 않다. 대신 중국은 북한의 후견국으로서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리고 경제개발과 관련된 경험을 나눌 수 있기에 중요하다. 또한 중국은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로 인해 일본이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 개발에 공동 참여하기로 한 점, 미국이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개발의 명분을 여기서 찾고있다는 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러시아도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체제 개발로 양국간의 군사적 균형이 깨질 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중, 러의 우려를 활용하여 북한이 미사일 문제 등에 대해 전향적 자세를 취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중, 러의 이해가 한, 미, 일의 이해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기에 북한이 중, 러를 자신의 뒤에 세워 연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북한이 근본적으로 미, 일과의 관계개선을 원하고 있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 중, 러와의 연대를 활용할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한반도 내부의 변화가 남북한과 주변국들간의 관계를 더욱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조정하고 주도해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해의식에 위축된 모습이 아니고 자신감과 비전, 그리고 철저한 계산에 기반한 외교역량이다.
/윤영관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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