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사람들은 미역 캐고, 나는 시를 캔다"이생진(71) 시인에게는 섬이 곧 삶이다. 50여년을 그는 한국의 섬들을 떠돌면서 시를 써왔다. “섬 사람들은 미역 캐고, 나는 시를 캔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가 섬에서 캐는 것은 시 그 이상이다. 그는 온전히 삶 전체를 섬에서 캐고 있다.
섬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섬이 되어버리는 지경. 그것은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술에 취한 바다’ 부분)라는 그의 유명한 시구처럼 어느 것이 먼저고 뒤라 할 수 없는 원융일치의 모습이다.
혹자는 그의 방랑벽을 일러 ‘현대판 김삿갓’이라고 한다. 혹자는 그와 함께 15년째 매월 시 낭송회를 열고 있는 ‘우이동(牛耳洞) 시인들’을 ‘우이동 원시인들’이라고 빗대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역시 스스로를 칭한 ‘걸어다니는 물고기’라는 별명이다.
“한국에 있는 섬은 3,201개, 연육으로 수가 줄어들어 지금은 3,200개일 겁니다. 무인도는 517개이지요.” 이씨는 그 섬들 중에서 무려 1,000여개를 떠돌았다.
가의도(賈誼島)는 그 수많은 섬 중의 하나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태안반도 안흥 앞바다에서 5.5㎞ 떨어진 면적 2.193㎢의 자그마한 서해의 섬이다.
이씨는 이번 문학기행 길로 다섯번째 이 섬을 찾았다. 섬 중에서 그가 제일로 치고 또 좋아하는 섬은 ‘섬의 제왕’이라 그가 부르는 제주도이지만, 이씨는 비교적 가깝고 자신의 고향(충남 서산) 앞바다에 있는 이 섬을 최근에는 자주 찾는다.
이전에는 섬이었다가 연육교가 건설돼 육지가 되어버린 신진도항(新津島港)에서 가의도 가는 배는 하루 두 번 있다. 이즈음에는 오전 8시, 오후 5시 두번 뜬다.
50명이 정원인 여객선에 일행 외에 동승한 사람이라고는 허리가 아파 육지의 병원에 다녀간다는 50대 아주머니 한 명뿐이다.
중국과의 교역 활성화를 대비해 해안을 매립하고 신축한 항구 주변을 떠도는 갈매기들만 잠시 동행이었다.
‘신진도에 들어서면/ 새들도 손수건을 꺼낸다/ 일제 말엽 지나가던 화물선이 포탄에 맞아/ 모래밭에 파묻혔을 때/ 징용 피하느라 누이 집에 숨었다가/ 달밤에만 돌아오시던 아버지/ 새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하루종일 헛간에 숨었다가/ 김 몇 톳 사가지고 돌아오시던 아버지/ 서해안을 쓸어가던 장티푸스로/ 그 해 서른여덟에 가신 아버지/ 새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바다에 오는 이유’ 부분)
이씨는 왜 그렇게 섬을 떠도는가. 섬, 하면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고독, 자유, 그를 찾기 위한 방랑 같은 낭만적 세목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섬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가마우지새, 원추리꽃, 갯메꽃 같은 자연 때문일 수도 있다. 섬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환상은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구절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듯한 느낌이 되는 것일까?”처럼 전자의 세목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씨도 그랬다. 6·25때 징병돼 제주도 육군 제1훈련소에서 훈련받고 기간병으로 남았던 그는 당시의 제주도를 통해 섬에 눈떴다.
이후 틈만 나면 제주도 전역을 도보했고, 고향 서산, 서울로 와서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면서도 방학 때면 등짐을 꾸려 섬을 떠돌았다.
정식 등단하기 14년 전 낸 첫 시집 ‘산토끼’(1955)부터 열번째 시집까지를 자비로 출판하면서도 그는 부인 몰래 적금을 들어 퇴직 이후의 섬 여행비용까지 마련했다.
93년 퇴직한 이후에는 물고기 물 만난듯 한 달에 열흘을 섬에서 산다. 97년 만재도에서 사흘간 머물면서는 ‘하늘에 있는 섬’이라는 시집 한 권을 썼다.
이런 심정을 그는 한 수필에서 말했다. 고군산열도의 한 섬인 대장도에서 만난 팔순의 할머니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저 끝 말도로 갑니다.” “어이구, 거긴 하늘과 바다뿐인데.” “그게 좋습니다, 하늘과 바다” 그는 차라리 하늘도 바다였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점차 이씨는 섬에서 고독과 자유, 자연과는 다른 것을 발견한다. 바로 섬의 역사요, 섬사람들의 삶이었다.
그가 최근 시집 이외에 산문집을 통해 섬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그 기록을 위한 것이다. “누군가는 섬을 정리해야 합니다.”신진도의 새울음 소리에서 그는 일제와 징용과 장티푸스를 기록했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되던 해 신진도를 다녀와서 일대를 휩쓸던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떴다. 가의도는 자연도 좋지만 이런 면에서 그가 유난히도 관심을 쏟아온 섬이기도 하다.
‘간다는 기쁨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마라/ 외로움이 기쁨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은행나무 때문에 간다고 대답할까/ 까치집 때문이라고 할까/ 아니면 13대째 내려오며 그 섬만 고집하는/ 朱氏(주씨)가 심심히 못여길까봐 찾아간다고 할까’(‘가의도 달밤’ 부분)
30여분 뱃길에 가의도에 도착하자 이 ‘주씨’가 마중나왔다. 마을사람들이 잡은 바닷고기를 넣어놓은 우물 같은 통 속에서 고기를 꺼내 회를 떠 이씨를 대접한다.
여름이면 민박을 치는 주씨의 ‘서울민박’ 집 이름은 이씨가 지어준 것이다. 이씨의 시구처럼 ‘마늘밭에 내린 촉촉한 인정’이 서로를 감싸고 있는 일흔을 넘긴 두 노인, 그들의 정이 부럽다.
2년 전까지도 가의도는 밤 11시만 되면 전기가 끊어지는 섬이었다. 아직도 이런 오지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해가 떨어지면 가의도는 문자 그대로 원시의 섬이 된다.
섬을 500여년 동안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 아래로 사람들은 깃든다. 주씨가 기르는 토종닭과 오리들도 조용히 홰에 올라앉는다. 파도소리만이 섬을 울린다.
이씨는 “전기가 끊어지던 시절에는 이 방에서 촛불 10개를 켜놓고 글을 썼습니다. 촛불 10개면 10촉이지요. ”라고 말했다.
10개의 촛불 아래서 그는 칠십 평생 떠돌아온 한국의 섬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친구여, 열다섯 살 친구여/ 지금 일흔, 그 세월이 어디에 묻혀 있을까/…/ 그것들 꼬박꼬박 흙에 묻히고/ 일흔이 된 지금에도/ 生(생)은 봄마다 고사리처럼 일어나는군/ 친구여, 열다섯 살 친구여/ 지금 일흔의 나이테에 무엇이 감겨 있을까/ 두충나무 잎이 피는군/ 살구꽃이 피는군’(‘흙에 묻힌 세월’ 부분).
이씨의 꿈은 북한 지역의 섬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미 북한주민접촉신청서를 내 방북 허가를 받아놓았다.
“평안북도 남서쪽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 마안도(馬鞍島)가 금강산보다 더 가보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서해 최북단의 마안도는 한반도 최남단의 마라도와 면적도 0.3㎢로 꼭 같다.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악수한 지금 그의 꿈이 이루어질 날도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 이생진 연보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196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 ‘먼 섬에 가고 싶다’ 수필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물고기’ 등
▲1996년 윤동주문학상 수상
하종오기자
joha@hk.co.kr
■"섬생활 곧 대 끊길것"
“섬에는 낫살 먹은 사람 밖에 없어.”
가의도 ‘서울민박’ 주인 주영복(朱永復·72)씨는 이렇게 말하며 쓸쓸함을 너털웃음으로 날렸다.
가의도에서 가장 ‘어린’ 사람은 서른아홉 살 먹은 노총각이다. 35가구 남짓, 70여명의 주민들이 대부분 노부부 아니면 홀로된 할머니들이다. 그들은 섬을 떠나지 못한다.
젊은이들, 어린이들은 모두 떠났다. 그나마 남아있던 초등학교 분교도 2년 전 폐지됐다.
주씨도 부인 최기순(崔基順·74)씨와 단 둘이 집을 지키고 있다. 고기잡이 나가거나 부인을 도와 미역 홍합 따고, 150여평 되는 마늘밭 가꾸고, 25마리 되는 닭과 오리 키우고, 텃밭의 상추 깻잎을 가꾼다.
그의 옆집에는 6·25 때 피난 와서 살던 노부부가 있었지만 이생진씨가 3년 전 가의도를 찾았을 때는 그들도 육지로 떠나버렸다.
이처럼 가의도에는 주민들이 떠난 빈 집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폐가들이 군데군데 있다. 그들이 쓰던 식기와 수저, 손질하다 만듯한 그물이 시간의 더께를 얹고 있다.
6·25 당시에는 육지에서 이 섬으로 피난민이 400명이나 몰려왔다. 당시 섬 주민이 70여호 400여명, 좁은 섬이 먹을 것도 부족할만큼 북적댔지만 피난민들은 섬 사람들의 따뜻한 정에 그대로 눌러앉아 산 이들도 많았다.
떠났다 다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10여년 전부터는 여름이면 피서객들도 많이 찾아오기는 한다.
이생진씨는 그의 시에서 주씨가 13대째 이 섬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주씨는 “8대조부터 이 섬에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8대조는 중국 땅에서 이곳 가의도로 귀양왔다. 가의도에서 중국까지는 요즘의 시간개념으로 따지면 지척일지 모르나 당시에는 이 서해의 외딴 섬이 귀양지였던 것이다.
주씨는 독자다. 그의 3녀 1남은 모두 인천 등지로 떠나 이제 이 섬에서는 대가 끊길 것이다. 우리의 섬들은 그렇게 더욱 외로워지고 있다. 이생진씨는 “반드시 이 섬들의 역사를, 그곳 사람들의 생을 기록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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