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많이 풀려 있는데 기업들은 돈이 모자라 아우성을 치고 있다. 거시적으로 보아서는 인플레이션을 염려할 정도로 느슨한 통화정책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기업들의 미시적 상황은 돈가뭄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왜 이러한 기묘한 현상이 발생했는가. 그 재앙은 회사채, CD 등 기업채권시장의 와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정부는 시장금리의 하향안정이라는 명분하에 채권금리를 거의 고정시켜 시장 기능을 마비시켜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투신사의 부실규모가 당초 정부가 발표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 알려졌고, 투신사 구조조정 방향도 뚜렷이 제시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대우사태의 여진과 이러한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투신사와 종금사들의 자금사정은 시간에 비례하여 악화했다.
이때 투신사들이나 종금사들에서 빠져나간 돈은 어디로 갔는가. 주로 은행으로 갔다. 그렇다면 은행들이 투신사나 종금사들이 못하게 된 금융 중개기능을 대신해주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상황은 그러질 못했다. 은행 구조조정 때문이다.
지금도 은행계에는 여러가지 구조조정 괴담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어떤 시나리오가 정설인지 아무도 모른다. 재경부나 금감위 그리고 청와대 경제수석이 서로 헷갈리는 단타성 발언을 허공에 내뱉을 뿐이다. 그렇다면 은행은 어떤 자세를 갖게 되겠는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자본 비율(BIS)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한편 대출 대상이 되는 기업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현대 쇼크와 새한그룹의 워크 아웃이 상징하듯 신용불안을 해소하기에는 아직 위험부담이 커 보인다. 기업들의 수익구조가 해소되었다고 하나 영업외 수지의 개선이 대종을 차지하고 경영효율 개선의 의한 영업이익의 증가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워크 아웃 기업들의 막대한 잠재부실의 부담을 안고 각종 괴담에 시달리고 있는 은행들이 경영성과와 재무구조가 불투명한 기업들에게 어떻게 적극적으로 금융기능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흐름을 놓고 볼 때 금융기관들의 기업어음과 회사채 매수기반을 확충하는데 중점을 두고 내놓은 이번 대책은 문제의식이 평면적이라는 데서 유효성의 한계가 있다.
10조원의 채권매수기금의 취지는 좋다. 그런데 그 돈을 어떻게 모을 것이며, 어느 기업들의 채권을 매수할 것인가. 금융기관들의 자금상황으로 보아 은행들이 출자해야 할 것인데, 과연 자발적인 출자가 가능한 상황인가. 회사채 거래의 시장기능이 무너진 상황에서 회사채 인수대상 기업선정은 누가 하고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특히 투신에 노후연금이나 퇴직신탁을 허용하겠다는 발상은 퇴직자나 연금대상자들의 노후생활을 볼모로 투신사와 기업들의 자금난을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해 보겠다는 매우 위험한 정책사고이다.
이러한 미봉책들로는 금융시장 불안을 해소할 수 없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도 없다. 보다 구조적인 대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우선 회사채 시장거래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기업채권의 금리변동을 시장상황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둘째, 은행의 구조조정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과거의 오판을 인정하고 미래를 향한 마음으로 금융기관에 대한 공적자금의 추가투입 소요액의 규모를 솔직히 밝혀서 국민의 이해와 신뢰를 구해야 한다. 넷째, 워크 아웃 대상기업들을 포함한 기업들에 관한 재무정보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밝혀주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현재의 금융시장 불안은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과 구조적 불확실성 때문에 발생했다. 때문에 이러한 문제의 해결없이는 금융불안은 계속될 것이고, 결국 신용경색과 금융위기로까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구조적 대응을 기대해 본다.
김광두·서강대 경제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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