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몸사리기 '利己' 금융정책 오락가락 탓“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누가 악의적으로 ‘연쇄 부도설’을 흘리는 겁니까.”
자금시장 관계자들이 요즘 한결같이 터뜨리는 불만이다. 시중에 통화가 넘쳐나고 기업 영업실적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금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신용경색의 실체는 무엇이고 왜 발생한 것일까.
▦은행은 ‘돈먹는 블랙홀’
시중 자금의 상당 부분은 은행 정기예금 등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은행에서 기업으로 자금이 흘러가지 않고 있다. 자금이 은행에서 ‘낮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은행의 자금중개기능이 사실상 마비되고 말았다.
은행 정기예금의 경우 1월 5조1,921억원, 2월 11조2,881억원, 3월 5조4,353억원, 4월 6조2,699억원, 5월 5조9,221억원 등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수시입출금식, 요구불예금 등을 포함하면 은행 예금은 올들어 5월까지 무려 43조4,468억원 순증했다.
문제는 은행에 몰려든 자금이 기업으로 다시 흘러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은행권은 몇몇 초우량기업에만 자금을 지원하면서 가계대출 비중을 늘리고 있다. 또 회사채나 기업어음(CP) 인수를 외면한 채 국공채 투자에만 주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투신·종금 구조조정 지연
‘대우사태 →투신 및 종금 부실 →시장 신뢰 추락 →회사채 및 기업어음(CP) 매수여력 상실 →중견기업 자금난 →연쇄 부도설 확산.’ 금융계 전문가들이 보는 현재의 자금상황 흐름이다.
대우사태에서 비롯된 투신사 및 종금사 부실이 결국 최근의 신용경색으로 이어졌다는 것. 정부가 이날 투신사에 노후연금신탁 판매를 허용키로 하는 등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투신업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시장상황을 보다 빨리 파악, 신속한 처방책을 내놓았다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 불신 심화
금융당국의 신뢰가 추락한 것도 기업들의 숨통을 옥죄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최근 투신권 등 금융기관들은 정부가 대우 발행 담보 CP 4조원 어치를 80%선의 가격으로 인수하겠다는 방침을 밝힌데 대해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정부가 금융기관들에 거의 강요하다시피 대우CP를 떠안겨놓고 이제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다는 반응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당시 구두로 100%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이제와서 담보가치가 떨어졌다며 말을 바꾸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정부를 믿고 위험이 있는 기업들에 자금을 빌려주겠느냐”고 주장했다.
▦은행의 역(逆) 모럴해저드
은행들은 과거에 리스크 관리는 전혀 하지 않은채 기업들에 마구 대출을 해주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범했다. 소위 ‘묻지마 대출’을 했다.
반면 지금은 몇몇 초우량기업을 제외한 거의 모든 기업에 대해 안면몰수하고 있다. 신용상태나 경영실적을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자금지원부터 거절하는 ‘몸 사리기’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기업들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S사 관계자는 “유일하게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은행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자금운용을 계속 할 경우 중견기업은 물론, 일부 재벌기업까지 연쇄부도 파장이 미칠 것”이라며 “은행 임원들이 책임 회피에만 급급해 기업들의 자금난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규기자
jkpark@hk.co.kr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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