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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50명 첫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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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50명 첫 교환

입력
2000.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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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 적십자회담6월 남북적십자회담은 고향방문단교환을 성사시킨 최초 회담인 1985년 적십자회담 8차 본회담을 참고삼아 진행될 것 같다. 8차 본회담을 반추하는 작업은 향후 회담을 전망하는데 도움이 된다.

회담 배경 8차 본회담은 1983년 아웅산사건으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북측 구도에서 비롯돼, 남측이 북측 수해지원 제의를 수용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1984년 10월 남측은 수해복구물자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온 북측 한웅식대표에게 회담재개를 요청했다. 이후 판문점 접촉을 통해 양측은 서울에서 본회담을 열어 이산가족 방문과 상봉등을 논의키로 했다.

8차 본회담 1985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회담에서 당시 남측수석대표인 이영덕(李榮德)한적부총재는 쌍방간 이산가족 의뢰서·회보서 교환을 통한 생사확인 단체방문의 상호교환 판문점면회소 설치 서신교환 보장 사망 이산가족들의 유품·유골 송환, 분묘 이장 적십자 공동위및 판문점 공동사무소 발족등을 제안했다. 특히 남측은 광복절 전후로 고향방문단을 상호교환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이에대해 북측은 국가보안법과 연관을 갖는 자유왕래 문제를 우선 논의하자는 주장을 폈다. 또 100명 정도의 예술단을 교환하자는 역제의도 내놓았다. 결국 양측은 광복절전후 고향방문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에 합의했다.

최종 합의 7월 15일부터 이루어진 실무접촉에서는 대표단 규모, 이산가족 방문지, 예술단 공연내용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막판 진통이 계속됐다. 북측은 이산가족보다는 예술단규모을 늘리려했고, 이산가족 방문지를 서울과 평양으로 한정하는 한편, 정치적 색채의 공연을 진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남측은 이산가족들이 고향 또는 고향이 있는 도청소재지를 방문할 수 있어야 하며 이산가족이 예술단원보다 많아야 한다는 논리를 맞섰다. 이 때문에 당초 방문단 교환예정일을 1주일 넘긴 8월 22일 양측은 이산가족 50명, 예술단 50명, 취재단 30명, 지원인력 20명, 단장 1명등 151명규모의 방문단을 추석에 즈음한 9월 20일-23일 교환키로 합의했다.

이후 논의 양측은 1989년 적십자 실무접촉에서 쌍방 350명 규모의 방문단 상호교환을, 1992년 7차 고위급 회담에서 240명 규모의 방문단 상호교환을 합의했으나 혁명가극 공연과 이인모씨 송환 문제로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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