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 제거계획한국전쟁 중의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전시독재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이렇게 헌정파괴행위가 빚어지자 전시독재에 환멸을 느낀 미국은 급기야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비록 도상작전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위기상황과 한미관계의 불평등한 측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부산정치파동은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임시수도 부산의 국회에서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해 통과시킨 최초의 헌정파괴행위였으며 전시독재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회 내의 간선 방식으로는 대통령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1951년 1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1952년 1월 18일의 표결에서 반대 143 대 찬성 19로 간단하게 부결되었다. 반(反)이승만 세력이 다수였던 당시 국회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거스르면서까지 개헌을 단행하려 했다.
1952년 5월 대구의 육군참모총장실에 1개 사단을 부산에 파견하라는 이승만으로부터 긴급명령이 하달되었다. 국회에 군대를 동원해서 압력을 가하려 했던 것이다. 이종찬총장은 미국의 압력도 있고 해서 파병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이종찬의 파병 거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의 충복인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동원해 5월25일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남과 호남지방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또한 야당의원들을 국제공산당과 관련있다고 조작해 구속했다.
미 대사관의 라이트너 대리대사는 계엄령의 조기해제를 촉구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5월30일 오후 3시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라이트너에게 “당신은 계엄령이 곧 해제될 것이라는 말을 당신 정부에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라이트너가 ‘곧’이라는 것이 2일정도냐 아니면 2주냐고 묻자 이승만은 “2분이 될 수도 있고 2개월이 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한국부흥위원단(UNCURK)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화를 냈다.
미 국무부는 5월 30일 주한 미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계엄권을 유엔이 인수하는 방안에 대해 클라크 장군과 플림솔 언커크 위원장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빨리 회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클라크는 31일 미 합참에 전문을 보내 이승만정부를 대신할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이제 미국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부는 쿠데타계획을 수립했으며 미국과 협조를 모색했다. 1952년 5월 29일부터 31일 사이 장면과 이종찬 등이 극비리에 미 대사관에 각각 쿠데타계획을 타진했다. 즉 장면은 라이트너에게 “밴플리트가 묵인하다면 이종찬이 거사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또 라이트너의 보고에 의하면 “5월 31일 익명을 요구하는 저명한 3성장군이 유엔에 의한 모종의 행동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부산지역에 대규모 소요가 있을 경우 유엔군이 어떻게 하려는지 알고 싶다”고 문의했으며 유엔군이 지지해주면 한국군이 행정부를 접수해 국회를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종찬은 미국이 지지해주면 제2병참사령부 예하 병력을 부산지역의 보안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미 국무부는 “이종찬을 비롯한 한국군 야전사령관들이 이기붕 전 국방장관 등 반대파와 연대하고 있다는 약간의 증거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육본 참모들과 이기붕이 연대한 쿠데타계획은 미국의 이승만 대체세력 모색과 반이승만세력 지지분위기, 그리고 미국의 군부에 대한 기대 등에 크게 고무되어 나타난 결과였으며 1961년 5·16의 한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라이트너는 6월 1일 여러 인사들과 이승만 제거계획에 관해 토의했다. 현 정치사태가 군사작전이나 사회·경제적 상황에 심각한 타격을 줄 때까지 유엔군사가 계엄권을 접수하지 않는다는 클라크의 신중론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른 대안들을 검토했다. 그것은 유엔 하의 계엄령을 선포해 이승만을 보호감금(protective custody) 하고 임시적 권력을 적절히 인준하는 식의 적극적 개입책이었으며 곧 국무부에 건의되었다.
그러나 클라크와 현지 군장성 등은 직접적인 군개입에 반대했다. 실제로 클라크는 이승만과의 6월2일 오후 2시에 행해진 면담에서 대사관이 권고하는 정치적 문제는 전혀 토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승만은 6월2일 아침 국회가 24시간 내에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지 않는다면 국회를 해산시킨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에 라이트너는 6월 3일 국회해산을 하지 말라는 트루먼의 친서를 전달했다. 결국 이승만은 예정된 국회해산을 보류했다.
이 과정에서 장택상 국무총리의 주도로 발췌개헌안이 마련되었고 미국은 이를 가장 바람직한 방안으로 판단해 지지했다. 그런데 6월 20일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선언대회’를 개최하려 하자 폭력배를 출동시켜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6월 21일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정부측 직선제 개헌안과 야당측 내각책임제 개헌안 가운데 좋은 점만 발췌했다 하여 그런 명칭이 붙었지만, 실은 대통령·부통령의 직선제를 골격으로 하는 정부측 개헌안의 변형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보다 적극적인 개입정책으로 전환했다. 6월 25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국무부는 합동회의를 열었으며 합참은 클라크 대장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한국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을 앞세운 쿠데타계획을 입안했다.
같은 날 미 국무부도 합참의 동의와 트루먼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훈령(이종찬이 한국군 통수권을 장악하여 부산을 관장하게 하는 안)을 무쵸와 클라크에게 보냈다.
그러나 7월 1일 계엄령 하에서 국회가 개원되자 미국의 쿠데타 검토는 계속 추진되지는 않았으며 종전의 ‘우호적 중립’에서 이승만지지로 급선회했다. 7월 4일 발췌개헌안이 상정되기 직전 미대사 무쵸는 신익희 국회의장을 만나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미국측의 태도에 희망을 걸었던 야당에게는 큰 실망이었다. 결국 7월 4일 밤 166명이 참석해 기립식으로 163명의 찬성을 유도했다.
클라크사령관이 이승만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여 본국에 보고한 것은 이미 상황이 끝났던 7월 5일이었다. 결국 클라크의 비상계획안은 사실상 사후약방문에 불과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제거안이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어 입안되었다.
◆에버레디계획(1953년 5월∼1954년 11월) 휴전협정 직전에도 이승만 제거계획이 또 다시 입안되었다. 이승만이 1953년 4월 24일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 북진을 표명하자 클라크 대장은 4월 26일 이승만 제거계획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는 이승만이 유엔군 통제를 벗어나 단독행동을 하는 경우 이승만의 보호감금과 임시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하는 비상계획의 수립이 필요하다고 본국정부에 통보했다. 이에 5월 4일 미8군사령관 테일러는 민간 지도자를 구금하고 잠정적인 유엔하의 군정을 선포하는 이른바 ‘에버레디계획(Plan Everready)’을 작성했다.
에버레디계획은 이승만이 유엔군의 통제를 벗어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문자 그대로 언제든지 준비될 수 있는 추상적인 안이었다. 클라크 장군은 1953년 6월 8일 에버레디계획을 수정했다. 군사정부 대신 한국군 및 정치인들을 이용해 미국에 순종적인(amenable)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그 골자였다. 미국은 이승만이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이 계획의 적용을 고려했다. 그러나 한국 군부 및 국민이 이승만을 계속 지지하자 실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철회했다.
휴전 직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휴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자 테일러는 10월 24일 에버레디계획을 수정했으며 28일 유엔군사령관 헐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안도 실현되지는 않았으며 이후에도 한미합의의사록 체결을 둘러싼 이승만 제거계획이 수립되었다. 1954년 11월 8일 주미대사 브릭스와 경제조정관 타일러 우드, 유엔군사령관 헐, 테일러 등 미국의 현지 관리들이 모두 도쿄에 모여 이승만이 계속 비우호적으로 나올 경우에 적용할 비상계획을 작성해 본국에 승인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안으로 그쳤다.
위에서 언급한 이승만 제거안들은 어디까지나 ‘계획’이나 ‘도상작전’에 불과했고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가상적 시나리오라고 하더라도 유엔군사령부와 미8군 고위 장성들이 숙지할 정도였으며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도 검토했던 하나의 심각한 대안이었다. 미국은 이승만보다 더 적절한 지도자를 구하려고 시도했으나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물리적이며 인위적인 직접 개입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장기적이고 간접적인 개입을 시도하는데 그쳤다.
*다음은 26일(월)자에 ‘휴전종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완범(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wble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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