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16일에도 남북문제 전문가를 초청,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지니는 의미와 전망 등을 심층 분석, 평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정세현 전통일부장관과 이번에 평양을 직접 다녀온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대담에서 “북한의 대남 정책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두 사람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정상은 최소한의 신뢰를 쌓았다”며 “어느 때보다 합의 내용의 실천 가능성이 높은 만큼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이행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상간 신뢰
이종석=순안공항에 김정일 위원장이 영접 나온 걸 보면서 정상회담이 새로운 역사를 써갈 것으로 예감 했다. 남북공동선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남북 정상 간의 인간적 신뢰 구축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신뢰를 가졌을 때 긴장을 완화시키고 화해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
정세현=서울에서 평양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본적으로 북한 대남 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현 정부는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우리가 대북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다. 이번에 북한이 화답한 것이 아니냐는 판단이 든다. 신선한 충격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종석=전문가로서 감(感)이라는 게 있는데 북한이 위장적으로 작게 변한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크게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세현=이데올로기적으로 꽉 짜여진 틀속에서 대남정책을 추진해온 게 과거 북한이었다면 이제는 새로운 틀로 나갈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남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다는 것, 남한이 북한을 해칠 뜻이 없다는 것 등을 파악했을 것이다. 내적으로 체제 안정을 했고, 웬만한 개방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선 것으로 판단된다.
군부를 대표하는 조명록총정치국장에게 오찬사를 하게 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대남 강경노선에서 비판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을 묶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주적 해결의 의미
정세현=그동안 ‘자주’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해 남북간 해석의 차이가 있었다. 새로운 해석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종석=공동선언에 “서로 힘을 합쳐”라는 문구가 있다. 우리는 당사자 원칙을 주장했고, 북한은 외세를 배격한 자주적 통일을 주장한 듯 한데 그 과정에서 두 개를 결합시켜 이렇게 나온 것이다.
‘자주’라는 말에 대해 그동안 민감해 왔던 게 사실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자주’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버전이 필요하다. 북한은 나름의 버전이 있다. 이를 하나의 버전으로 만드는 과정이 통일의 길이다.
주한 미군 문제에 대해서는 김대중대통령이 김위원장과 긴 논의를 한 것으로 안다. 김위원장이 주한 미군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얘기를 했다고 전해 들었다.
정세현=김위원장은 북한이 해석하는 식으로 얘기 했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식으로 했을 것이다. ‘자주’를 미군 철수나 공조 파기로 해석하는 것은 북한 입장이다.
김대통령은 아마 “미군이 있다고 ‘자주’가 없다고 하면 일본과 독일은 어떻게 봐야하나”, “한·미·일 공조는 앞으로 북한을 돕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등 이런 식으로 설득했을 것이다.
이종석=주한 미군에 대한 북한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고 김위원장이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이 언젠가 적절한 시점에 이러한 북한의 인식 변화에 대해서는 얘기할 지 모르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자주’는 과거 통일전선전략과는 다른 것이다.
정세현=‘자주’라는 표현에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미국도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낮은 단계의 연방
이종석=남북이 연방제와 연합제를 주장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거꾸로 제안하고 있는 모습이다. 경제 발전의 차이가 있는데 연방제가 된다면 오히려 북한에 불리하다.
그러나 우리는 연방제를 공산화 통일 전략으로 간주, 무조건 반대하고 있다. 우리가 연방제가 좋다고 하면 북한은 아마 (연방제를)못할 것이다.
연방제를 놓고 김위원장이 발언을 많이 한 것 같은 데 그 때 우리측이 “연방제라면 군대는 어떻게 통합하고 외교는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했고 그러자 김위원장도 “우리도 그게 아니다”고 했다고 한다. 이를 맞춰가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나온 것 같다.
정세현=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도 90년대부터는 독소 조항이 빠지는 등 내용이 많이 바뀌었다. 느슨한 연방제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남북 연합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제는 연방제라는 용어에 대한 선입감을 지워도 될 때라고 생각한다.
이종석=일단은 남과 북이 처음으로 통일 방안에 대해서 의견의 접근을 봤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름대로 북한이 현실 지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정세현=연방제라는 용어를 북한이 계속 쓰면서도 사실상 남북 연합의 개념을 수용한 것은 70년대부터로 볼 수도 있다. 실제적으로는 남북조절위원회가 아주 초보적인 형태의 국가연합이다.
▲균형적 발전의 의미
정세현= 6·15선언에서 언급된 남북의 ‘균형적 발전’은 남북기본합의서 15조에도 나와 있다. 요즘 북한의 형편이 더 어렵다보니 혹시라도 일방적으로 북을 도와 주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령 경의선 철도만 보더라도 북은 통과료만 받아도 도움이 되고 남은 물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동남아에 나가 있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북한에 옮긴다고 생각하면 북은 임금을 벌 수 있고 우리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남과 북이 함께 득을 보는 게 균형적 발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일방적으로 북한에 주기만 하는 것은 북한이 자존심 때문에서라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종석=이 조항은 곧 당국간에 실무진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경제 지원을 하더라도 일방적 지원 형식은 모양이 좋지 않다. 그래서 표현을 이렇게 쓴 것 같다.
북한의 식량과 전력 문제는 분명히 심각하다. 본질적 SOC 사업은 서로 이익이 되는 부분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실제 그런 부분들이 많이 있다. 기업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정세현=도로 전력 항만 등 SOC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 기업이 북한에 들어갈 경우 원가를 낮추는 일일 수도 있다.
이종석=어차피 지원 규모는 문제가 될 것이다. 정부는 적정 규모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남북의 긴장 완화에 얼마나 도움이 됐느냐를 평가해야 한다.
사실 남북간 긴장에 따른 불필요한 비용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현 단계에서는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 평화에 대한 비용을 어느정도 치를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세현=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평화만 얻으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20년 동안 서독은 동독에 무려 460억달러를 쏟아 부었다. 평화도, 통일도 모두 돈이 들어간다.
▲이행 등 전망
정세현=극적으로 공동선언에 합의하고 남북이 쉽게 가까워 진 것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그렇지만 주변 국가들도 진심으로 기뻐하겠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남북이 한반도 문제에 있어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나라들이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의 영향력을 신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나라도 있을 수 있다.
남북이 화해 분위기로 가면서 한반도 문제의 민족화 정도가 높아진다. 그에 못지 않게 주변 4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개입, 국가 이익의 확보, 영향력 유지 등을 둘러싸고 경쟁이 심화할 것이다. 잘못하면 역으로 한반도 문제의 민족화가 아니라 국제화 쪽으로 흘러갈 위험성도 있다.
그래서 남북간 협력이 더더욱 필요하다. 동북아 질서의 재편으로 표현될 만큼 많은 변화가 올텐데 여기서 희생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이 정말 협력해야 한다. 잘못하면 구한말과 비슷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종석=남북이 귀중한 합의를 했고 이 합의를 꼼꼼히 따져가면서 했다는 데 상당히 의미가 있다. 물론 이 같은 이유에서 실천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이 합의는 양 지도자가 남북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해 초석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이제 시작이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북 당국간 대화 기구가 상설화되고 거기에 따라서 여러 부문별 위원회가 가동하는 과정이 진행돼야 한다. 이 과정속에서 북한도 변해야 하고 우리 사회도 변해야 한다.
화해와 협력이라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민족 공동 이익의 시대, 이른바 민족 상생의 시대로 이행하는 상황에 스스로를 맞춰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냉전적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분단의 시대에서 평화와 통일의 시대에 발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국내적 기반이 구축 돼야만 공동선언이 결실로 나타 날 수 있다.
정리=최성욱기자 feelchoi@h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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