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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는 한민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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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는 한민족의 날"

입력
200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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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화해의 길을 앞서간 사람들반세기만에 이뤄진 남북 정상의 만남은 통일의 물꼬를 트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이 시대 최대의 사건이다. 하지만 두 정상의 만남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라 남북을 오가며 닫힌 마음을 열고 얼어붙은 형제애를 일깨운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북한 동포들이 어려움에 처하자 그들을 돕는데 앞장서온 월드비전의 오재식 회장과 유진벨 재단의 스티븐 린튼 회장이 이번 회담의 의미와 북한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 대북지원사업을 해온 두 분으로서는 남북정상회담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을 텐데요.

▲오재식 = 첫날 집에서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는 모습을 보고 출근했는데 궁금해서 안되겠더라고요.

제 방으로 TV를 가져와 다음 장면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정상회담 감동 너무 벅차 우리가 만일 어려워지면 우릴 도울곳은 북한"

▲린튼 = 15일 종로 탑골공원에 가보았어요. 정상회담이 3·1운동에 버금가는 큰 일이라는 생각에 3·1운동의 현장인 그곳에 갔던거죠.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한 그 순간 한반도의 정신적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동안 북한을 오가며 느꼈던, 보이지 않는 그 장벽때문에 절망할 때가 있었는데 이젠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어요.

"北사람들 감정적 저항 이젠 걱정 안해도 돼 民官교류 역할분담 중요"

▲오재식 = 정상의 만남은 남북이 불신을 씻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수 있게된 상징적 장면이었어요. 공동선언문을 보고 해방 당시에 버금가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린튼 = 정상 회담이 이뤄진 요 며칠을 ‘한민족의 날’로 부르고 싶어요. 우리 가족이 한국서 보낸 100년 이상의 시간 중 손으로 꼽고 싶은 날이에요.

▲오재식 = 다음에 북한 사람 만나면 무슨 이야기 할까 마음이 설렙니다. 훨씬 다양한 이야기를,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두 분은 어떻게 북한과 인연을 맺었습니까.

▲린튼 = 저는 미국서 태어났고 국적도 미국이지만, 반(半) 한국인입니다. 1895년 외증조부(유진 벨)가 한국에 선교사로 온 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등 가족들이 전남·북과 충남 등지에 20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한남대 등 교육기관과 병원을 세우는 등 한국서 뿌리를 내렸거든요.

한국 이름도 다들 갖고있지요. 전남 순천서 태어난 동생은 존 린튼이란 영어 이름보다 인요한이란 한국 이름이 더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가족 이야기를 한 것은 다른 한국인처럼, 저도 북한에 대한 호기심을 자연스럽게 가졌다는 사실때문입니다. 꼭 한번 가보자는 생각을 갖고있었지요.

▲오재식 = 그러면 북한은 언제 처음 갔습니까.

린튼 = 1979년 평양서 열린 세계탁구대회에 관중 겸 관광객으로 처음 방문했습니다.

일본으로, 또 중국으로 건너간 뒤 기차를 타고 평양에 들어갔는데 그 때만해도 북한 경제가 괜찮을 때여서 한눈에 중국보다 잘산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북한서 군인과 철도관리들을 만났는데 한국말을 쓰는 미국인을 보더니 당황해하면서도 신기해했어요. 낯이 좀 익자 참 친절하게 대해 주더군요.

▲오재식 =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근무하던 88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교회 지도자들이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북한 사람을 봤어요.

얼굴도, 언어도 꼭 같아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농담도 많이 했지요. 평양에는 97년 월드비전 국제본부 부회장 자격으로 처음 갔어요. 95, 96년 대홍수로 북한이 힘들어할 때 였습니다.

북한은 90년대초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에너지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등 곤경에 처해있었는데 홍수까지 겹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월드비전은 96년10월 평안남도 평원군에 국수공장을 세웠고 다시 공장을 5곳 더 짓기로 하는 과정에서 방북했지요.

공장 가동을 위한 발전기와 밀가루, 국수 배급용 트럭 등도 지원했고 그 뒤로는 농업 기술 제공에도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여섯번 북한을 갔다왔는데 북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서 진심을 확인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참 따뜻하게 대해주었어요.

▲린튼 = 저는 평양을 다녀온 뒤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10년 정도 남북한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 뒤 학술교류를 위해, 또 민간 교류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갔었어요. 지금까지 북한에 서른 다섯번 정도 다녀왔는데 북동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보았습니다.

▲오재식 = 결핵 퇴치 사업은 어떻게 해서 시작했습니까.

▲린튼 = 대홍수가 난 뒤 국제 자선단체들이 북한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사실 한민족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합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손 벌리지 않잖아요. 자선단체들이 그런 걸 모르더군요.

또 한가지, 북한이 어렵다면 남한이나 해외 동포들이 돕는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한을 제대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외증조부 이름을 따 95년 미국서 유진벨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중국 등에서 곡물을 구입, 컨테이너와 화물열차편으로 보냈지요. 남한에서는 97년 어머니(로이스 린튼·한국 이름 인애자)가 원장으로 있는 순천기독병원에서 유진벨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같은 일을 시작했고 올들어 유진벨 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에 사무실도 냈습니다.

식량지원사업을 하면서 북한의 결핵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알게됐어요. 북한은 도마다 결핵전문병원이 있고 결핵요양원도 63곳이나 있지만 진단 기구와 약이 부족했습니다.

▲오재식 = 북한 돕기 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북한은 과연 우리가 돕기만 할 대상인가.

물론 북한이 지금은 어렵고 그래서 우리가 돕는 게 당연하지만 앞으로 북한이 좀 더 잘 살고 반대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우릴 도와줄 곳은 북한 아닐까요.

▲린튼 = 그래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졌고 그래서 같은 동포로서 돕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형제가 어려워지면 돕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대북 지원 사업을 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까.

▲오재식 = 많았어요. 무엇보다 신뢰 관계 형성이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남에서 왔다니까 경계를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내 피부가 하얀 색이었더라면…’하는 생각까지 했겠습니까. 남한에서는 “우리도 힘든데 왜 북까지 도와주려하느냐”는 감정적 저항이 있었습니다.

▲린튼 = 모금이 가장 어렵습니다. 모금을 하다보면 남한 사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번 하면 통 크게 많이 내놓는데, 횟수가 적어요.

그러니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어렵고, 항상 새 후원자를 찾아다녀야합니다.

처음에는 재외 동포와 남한 교계에서 도움을 주었는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에는 외국 단체의 관심이 더 큽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동포들이 더 많이 나서야하지 않겠습니까.

▲오재식 = 저는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걱정이 생겼습니다. 남북관계에 정부 역할이 너무 커지면서 민간 역할이 위축되지나 않을 지 하는 것이지요.

정부와 우리같은 민간 단체의 역할 조정이 잘 돼야할 것 입니다. 적어도 남북의 물꼬를 트는데 민간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은 사실이거든요.

▲린튼 = 중요한 지적입니다. 사실 오회장같은 분이 있었기에 정상회담이 가능했지 않겠습니까. 신뢰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민간단체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지요.

- 남북관계의 변화로 두 분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넓어질텐데요, 새롭게 하고싶은 일은 없습니까.

▲오재식 = 그동안 한 일만도 참 벅찼습니다. 사업을 늘릴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하던 일을 차분하게 계속해나가는 게 중요하겠지요. 북한 어린이보건사업을 하려는 데 이는 이미 계획했던 일입니다.

▲린튼 = 저는 정상이 만난 것 자체만으로도 90%는 성공했다고 생각했어요. 공동선언문까지 나왔으니 예상을 뛰어넘는 큰 성공이지요.

하지만 아직은 시작입니다. 이제 선을 보았는데 자식 이름까지 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단체도 이런 일을 더 하겠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하는 결핵 퇴치 한번 잘 해보렵니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통일 등에 대한 관심이 한껏 고조돼있습니다만, 저는 국민들이 그런 ‘큰 일’뿐 아니라 결핵환자 등 북한의 어려운 사람들도 계속 기억해주길 간곡히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오재식

1933년 제주서 태어났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통일문제연구원장, 세계교회협의회(WCC) 제3국 정의·평화·창조 국장, 크리스챤아카데미 한국사회교육원장 등을 역임했다.

97년부터는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옛 한국선명회) 회장을 맡고있다. 한국자원봉사단체협의회 부회장, 통일고문회의 위원 등으로도 활동중이다.

●스티븐 린튼

한국이름은 인세반. 1950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외증조부 유진 벨이 1895년 선교사로 온 뒤 린튼 가문은 교회 개척, 대학 설립 등을 통해 한국과 계속 인연을 맺고 있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땄다. 컬럼비아대 교수를 거쳐 미국 유진벨 재단 이사장, 한국 유진벨 재단 회장으로 활동중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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