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의 대내외 정책을 전면 재조정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보여준 파격적 행보와 회담 성과물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부세계를 향한 그의 ‘변화 드라이브’에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이다.드라이브의 첫 목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남북관계의 ‘신 패러다임’ 구축이다. 남한의 군통수권자인 김대통령에게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토록 한 것이나, 국방위원회 장성들로 하여금 김대통령에게 술을 따르도록 한 것은 대결을 화해로 전환시키겠다는 명백한 메시지다.
경제협력 등 각 분야의 남북교류를 전면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경의선 철도 복원문제는 민족경제의 대동맥을 잇는 큰 사건이고 임진강 공동수방대책도 상징성이 크다.
이같은 대남관계 전환의 지향점은 말할 것도 없이 북한 경제재건이다. 북한은 1990년대부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고 식량난은 여전하며 에너지난으로 산업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외부자본과 기술의 수혈이 절실하다. 김위원장이 지난달 중국 방문때 “덩샤오핑(鄧小平)동지의 개혁 개방 정책이 옳았다”고 평가한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중국식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형태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 김위원장이 서울답방을 수락한 것에서도 본격적 경제개혁에 나서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그러나 방문시기는 양측이 암묵적으로 합의했더라도 남북경협 등의 추이에 따라 유동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대외 관계분야에서도 김 국방위원장의 새판짜기 시도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우선 한국을 제치고 미국 및 일본과 상대하겠다는 그동안의 통미봉남(通美封南)정책은 서울을 통해 워싱턴과 도쿄로 가는 것이 떠 빠른 길이라는 인식으로 바뀐 듯하다.
물론 중국과의 혈맹관계 복원과 러시아와의 관계개선 등으로 한·미·일 공조에 대항한 견제장치와 안전장치를 동시에 만들고 있다.
남한 및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병행해 이뤄지고 있는 이같은 ‘배후 강화’ 구상은 다음달에 방북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10월에 방북할 예정인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등과의 회담에서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교황의 방북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나선 것도 대외 이미지 개선과 개방을 향한 터닦기 작업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국내 지지기반에 대한 김위원장의 자신감에 바탕한다.
결국 김위원장은 대남정책을 바꿔 경제의 숨통을 트면서 미 일과의 적극적 관계개선을 통해 동북아에서 독자적 생존영역과 변화의 주도권 확보를 노리고 있는 것 같다.
박진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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