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는 우리 가족에게 거의 모국어랍니다”15일 독일 TV에 출연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유창한 독일어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독일어 실력은 1985년~90년 동독에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첩보원 활동을 하며 닦은 것이지만, 독일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날 푸틴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양국 관계를 ‘전략적 관계’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했다. 슈뢰더가 더 적극적으로 표명한 ‘전략적 관계’는 독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에만 사용하던 용어였다. 독일의 코소보 파병, 러시아의 체첸 공격 등으로 소원했던 양국 관계가 이렇게 급격히 회복되리라고는예상치 못했다고 외신들은 지적했다.
5일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푸틴의 유럽 순방은 전반적으로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대통령 취임 ‘신고식’의 성격이 강했던 순방 외교에서 푸틴은 무엇보다 유럽인들에게 ‘대화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특히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NMD) 체제의 위험성을 지적, 유럽의 공감을 얻어냈다. 한 발 더 나아가 러시아가 구상중인 전유럽미사일방어망 구축을 대안으로 제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서는 적극 개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도 표명했다. 그는 얼마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모스크바 회담에서도 탄도미사일방어(ABM) 협정의 개정을 단호히 거부, 강력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과거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툭하면 표출했던 감정적 마찰은 전혀 없었다. 푸틴은 순방기간 중 제기된 언론재벌 탄압 논란이나 러시아의 체첸 무력진압에 따른 인권 문제 등도 적절하게 무마하는 노련미를 보였다.
경제적인 실리를 챙기는데도 성공했다. 푸틴은 러시아의 경제개혁을 강조하며 독일의 지원을 요청,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독일은 러시아에 430억달러나 되는 채권을 갖고 있을 정도로 사활적 존재다. 이탈리아는 흑해를 관통하는 가스관사업 등에 15억달러를 투자키로 했다.
‘강한 러시아’를 표방한 푸틴의 외교 공세는 7월에는 동북아시아로 확장될 전망이다. 그의 외교는 겉으로는 직접 마찰을 피하면서 국익을 추구하는 실용주의 노선인 듯하지만, 강대국 지위 회복을 위해서는 단호한 정책도 불사하는 형태로 정립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은 7월중순 중국을 거쳐 러시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뒤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열리는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