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 말 아끼고 침착하게 대응김대중 대통령은 13일 평양으로 향하는 전용기에 오르기에 앞서 대국민인사를 통해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가지고 방문길에 오르고자 합니다”라고 다짐했다. 2박3일의 평양체류중 김대통령은 실제 언행을 통해 이 다짐을 그대로 실천했다.
김대통령은 우선 일부에서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말과 행동에서 거의 ‘오버’하지 않았다. TV로 생중계된 많은 행사에서 김대통령은 보수적인 국민감정을 건드릴 여지가 있는 선을 일절 넘지 않았다. 13일 순항공항 영접행사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반갑게 두손을 맞잡았으나 포옹은 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또 북측의 배려탓도 있었겠지만 김일성 주석과 관련한 기념장소 등 논란이 될만한 장소나 시설의 방문도 적절히 피했다.
김대통령은 한때 남북관계를 크게 경색시켰던 ‘김일성 조문 발언파문’에 대해 14일 목란관 만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이래 우리 민족 전래의 윤리에 따라 3년상을 치른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였습니다”라고 매우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넘어갔다.
김대통령의 차분함은 김위원장과의 회담이나 대화 과정에서 특히 잘 드러났다. 김위원장이 남한과 서방세계에 잘못 알려진 자신의 이미지를 일거에 불식하려는 듯 거침없는 제스처와 호방한 말투로 분위기를 주도했지만 김대통령은 말을 아끼고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김위원장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는 노련함을 보였다.
평소 남북문제를 비롯해 다방면에 걸친 지식에 바탕한 다변으로 잘 알려진 김대통령이 이처럼 말을 아낀 데 대해 박준영 청와대대변인은 “김국방위원장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가능한 많이 듣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김대통령의 그같은 대응은 자신감의 발로이자 실사구시(實事求是)정신 그 자체”라고 평했다.
김대통령은 이산가족 문제해결 등 이번 정상회담에서 얻어내야 할 최소한의 목표에 대해서도 김정일 위원장이 먼저 ‘실향민의 눈물’을 언급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김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기대수준 조절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고, 할말은 다하며,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풀어가겠다”는 김대통령의 말은 이번 정상회담을 관통한 대원칙이기도 했지만 국민이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도 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같이 침착하고 노련한 협상력으로 적지않은 성과를 얻어내 서울로 돌아온 김대통령이 이 성과를 어떻게 관리 발전시켜 나갈 지 주목된다.
이계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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