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 한영백씨 3형제 감격토로아무 일도 못한 채 그저 몇번씩 울고 웃으며 지샌 날이었다.
북에 고향을 둔 이들치고 절절한 사연없는 이가 있을까마는 그 지난한 세월이 희망으로 바뀐 15일, 어디를 막론하고 모여앉은 실향민들은 가슴에 켜켜이 쌓여온 한을 새삼 풀어내며 눈물을 쏟고 감격을 토로했다.
15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민회를 찾은 함남 함흥 출신의 한영백(韓泳伯·74·경기 안양시 평촌)·영중(泳仲·69·서울 강동구 천호동)·승우(承佑·58·서울 성동구 성수동)씨 3형제도 바로 그런 실향민이었다.
“살아계시면 구순(九旬)고개를 넘기셨을 부모님과 북에 남은 다섯형제, 남녘땅에서 기적처럼 만나 먼저 세상을 떠난 두 누이.
단 하루도 눈에 밟히지 않는 날이 없었어….” 지그시 감은 눈 사이로 또 눈물이 비치는 순간, 영백씨는 “이 사람들아 이제는 우리도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게 됐네”라며 와락 두 동생을 끌어안았다.
해방 직후 조만식(曺晩植)선생의 조선민주당 간부를 지낸 아버지(생존시 92세) 밑에서 아들들은 변호사사무실 사무원으로, 함흥 제일의 고려약국 견습약사 등으로 나름대로 한가락씩 하던 이들 가정의 행복은 아버지가 49년 사상범으로 함흥형무소에 갇히고 전쟁이 터지면서 산산이 깨졌다.
영백씨는 국군 3사단에 자원해 남쪽으로 떠났고 영중씨는 51년 흥남철수 때 마지막 배에 올랐다. 시집간 누이 둘은 남편과 함께, 어머니와 헤어진 막내 승우씨는 친척손에 이끌려 각각 월남했다.
“그때만 해도 길어야 석달쯤이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 하지만 남에 내려온 5남매가 다시 만나는 데만도 7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부산에서 빵지게를 지고 국제시장을 헤매이던 영중씨는 부상을 입고 국군병원에 입원해있던 영백씨와 1년여만에 극적으로 상봉했지만 막내 승우씨는 57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이후 영백씨는 노동일을 하며 승우씨를 키웠고 그림에 재능이 있던 영중씨는 갖은 고생 끝에 우리나라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초상화가가 됐다.
“뭐 고생하긴 했지만 실향민치고 이 정도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어. 막노동을 마다않고 키운 막내 승우가 대기업 이사까지 지냈으니 부모님께도 조금은 낯이 서게 됐을 뿐이지.”
군 근무경력, 5형제의 월남 사실이 북에 남은 부모·형제들에게 불이익을 줄까 두려워 그동안 이산가족찾기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는 3형제는 “남북정상이 합의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우리 3형제의 50년 한맺힌 꿈도 이뤄질 것 같다”며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안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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