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평양.원산 기관사 우익환.이순복씨“죽기 전에 이 선로가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이어지기만 하면 고향땅까지 불과 2시간인데….”
13일 오전 경기 파주시 문산읍 경의선 철도중단점. 대통령이 처음으로 북녘 땅을 밟은 바로 그 시간, 반세기가 넘도록 ‘달리는 철마’의 꿈을 가슴에 묻어두었던 노(老)기관사 우익환(禹益煥·79)·이순복(李順福·76)씨는 다시 녹슨 철로 위에 섰다.
“경원선 운행 실력은 이형이 최고였어. 나는 경의선 쪽에선 한가락 했지.”
황해 평산군 남천면 고향의 보통학교 시절, 해질 무렵까지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뒹굴다가도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운동장 바로 옆을 내달리던 ‘철마’를 볼 때면 항상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우씨.
18세 때인 1939년 총독부 산하 황해 철도국에 입사한 우씨는 2년간의 조수생활을 마치고 43년 10월 마침내 ‘푸른 제복과 각진 모자’의 꿈을 이뤘다.
“운전대를 처음 잡던 그 날, 정말 날아가는 기분이었어. 땀과 석탄가루가 범벅이 된채 서울에서 평양(경의선 260㎞구간)까지 신나게 달렸지.”
42년부터 경원선 서울-원산 226㎞를 운행했던 이씨도 “운행 첫날은 정말 큰 벼슬한 기분이었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남북을 오르내리던 노기관사들이 가장 잊지 못하는 추억은 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수많은 이들을 실어날랐던 일. 차표도 필요없었던 그 때, 객차는 물론 화물차, 지붕 꼭대기, 심지어는 석탄을 쌓아두는 곳에까지 귀향객들로 넘쳐났다.
연일 이어지는 운행스케줄에 눈조차 제대로 붙일 수 없었지만 귀향에 들뜬 사람들의 환한 표정을 보면 피로가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했다.
“개성을 막 지나 고갯길을 넘어갈 때면 항상 손을 흔들어주는 예쁜 아가씨가 한명 있었어. 나도 그 길을 지날 땐 어김없이 기적을 울리곤 했지.” 이 대목에서 우씨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이런 보람도 잠시. 미소 양군의 남북 분할 주둔과 함께 경의선과 경원선은 해방 단 한달만에 운행이 공식 중단됐다. 이듬해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들을 태우고 북을 오가며 실날같은 희망을 키워도 보았지만, 곧이어 터진 6·25 전쟁은 모든 꿈을 일순간에 수포로 돌리고 말았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노기관사들의 가장 큰 바람은 말할 것도 없이 단절된 경의선의 문산-봉동, 경원선의 신탄-평강의 복구.
“내일 모레면 80인데 기관차 운전대를 다시 잡긴 힘들겠지. 그래도 38선을 가로질러 평양, 신의주까지 기차로 여행할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면 더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고개들어 북녘 하늘을 망연하게 바라보던 백발의 기관사들 눈에는 어느새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양정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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