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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날때부터 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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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날때부터 王?

입력
2000.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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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태조 왕건'의 역사관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웅장한 스케일과 삼국지를 연상케 하는 치열한 3파전의 열기로 시청률 40%에 육박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늘 조선시대 궁중사와 야사에만 매달렸던 우리 사극이 사상 처음 더 거슬러 올라가 후삼국 시대를 다뤘다는 점, ‘고려사에 대한 왜곡된 시각의 수정’은 분명 평가받을 만하다.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조선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 고려를 부정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므로 척박한 사료를 헤집고 웅대한 고려사의 시작을 재구성한 제작진의 도전과 땀이 곳곳에 보인다.

그러나 극적인 재미에 치우친 나머지 역사가 개인의 신격화로 이어지는 것은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왕건이 도선에게‘도선비기’를 전수받는 광경은 드라마의 정통성을 의심케 한다.

18회(5월 27일 방송)에 토굴에 들어간 왕건은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책을 앞에 놓고 당황해 하다가 마른 벼락소리와 함께 모종의 ‘계시’를 받아 삼한의 지세와 백성들의 기개, 풍수지리학적으로 국가를 도모할 수 있는 지역까지 치세에 필요한 모든 진리를 깨우치기 시작한다.

그가 모습도 보이지 않는 도선대사와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컴퓨터그래픽까지 동원해 천지신명이 조화를 부린다.

드라마 초반부터 도선대사는 왕건이 태어나는 것부터 미리 감지하고 그를 ‘새나라를 건국할 위인’이라 했다.

그리고 그는 궁예를 ‘때를 잘못 만난 미륵’으로, 견훤을 보필하는 최승우는 ‘주인이 없는 자리에 발을 내딛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왕건만이 진정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영웅’이다. 도선비기가 왕건에게 전수되었다는 내용 자체는 고려사절요, 고려사 등 여러 사서(史書)에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나친 극화는 한 시청자의 우려대로 운명은 정해진 것이니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역사관을 심어주고, 진지한 기획 의도 자체를 희화화시킨다.

현재 왕건은 세 영웅 중 가장 유복한 환경을 타고난 인물.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포용력과 카리스마로 창업을 이루어가는 다른 영웅들, 특히 궁예에 비해 아직은 한없이 유약해 보이기만 한다.

그런 그에게 드라마는 도술의 힘을 빌어 그의 ‘영웅탄생’신화를 설명하려 한다.

재구성된 드라마 또한 수많은 사서들이 승자의 편에 서서 서술한 일방적인 승자의 것이 위험성이 다분하다.

역사학자 허스트(G.G. Hurst) 3세도 ‘왕건이 궁예의 탓으로 돌린 모든 행동들은 왕건의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된 것’으로 평가했다.

고려의 재평가는 왕건의 그늘에 가린 두 영웅에 대해서까지 정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극에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런

‘승자의 논리 밑에 가려진 진실을 엿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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