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9월공세로 이미 내전상태 돌입한국전쟁을 논하면서 공산게릴라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공산게릴라전은 한국전쟁의 또 다른 한 차원을 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시작과 전개과정 및 최종적인 종료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산게릴라전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대한민국의 군대, 경찰, 우익단체들이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중국 베트남 쿠바 등지에서 전개된 게릴라운동에 비해 이용할 수 있는 자료나 이론적 연구가 현저히 부족한 실정이다.
◆야산대와 빨치산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개된 게릴라운동은 그 시기와 운동의 성격상 4개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대구 10·1사건, 제주 4·3항쟁, 여·순반란사건의 진압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야산대의 투쟁으로, 게릴라가 ‘민간인 전투원’이라는 의미에서 순수한 게릴라전은 이 시기에 한정된다.
이 시점에서의 게릴라운동은 한국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 집단이 남침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한국전쟁의 내전적(內戰的) 측면을 구성하고 있다.
둘째, 1949년 여름에 남·북 노동당과 남·북민전이 김일성집단의 주도하에 합쳐지면서 남한에서의 게릴라운동을 김일성정권이 직접 운용하였다.
특히 그해 하반기에 ‘9월공세’를 감행하면서 본격적인 게릴라전의 양태를 띠게 되었다.
김일성정권이 이승만정권을 무력으로 정복하여 공산화통일을 시도한 것이‘한국전쟁’이라면, 이 전쟁은 비단 1950년 6월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1949년 하반기에 시작되었다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셋째,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좌절되고, 북한군의 퇴로가 막히면서 패잔병들이 집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국군이 한·만 국경선 부근까지 진격했던 1950년 10월에 공산유격대의 규모는 38선 이북지역인 양구 평강 곡산 양덕 일대에 약 1만명, 38선 이남지역인 오대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일대에 약 1만5,000명이 있었다.
이들은 철의 삼각지대에 제2 전선을 구축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병참선과 작전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남부군(조선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이 결성되면서 한국군 전력의 상당부분을 호남·지리산 일대에 묶어두었다.
넷째, 전선이 고착되고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북한정권으로부터 어떤 배려나 지원도 없이 소모적 저항을 하며 멸망해 가게 되었다.
이 시리즈에서는 공산게릴라전이 한국전쟁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일반적인 게릴라전과는 달리 왜 단기간에 막을 내리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전쟁과의 상관성
1948년초에 단독정부 수립안이 구체화하자 남로당은 대중동원을 통한 폭력투쟁을 전개하면서 그 해 중반부터 유격전구를 편성하는 등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1949년초에 그동안 남로당 수뇌부에 의해 운영되어오던 ‘강동정치학원’이 폐쇄되고 ‘제3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이를 김일성집단이 직접 운영했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에는 남·북노동당과 남·북민전이 합쳐지면서 남로당 수뇌부는 김일성체제에 흡수되었고, 남로당의 유격대도 개편되어 김일성집단에 의해 직접 조정되었다.
그런데 1949년 후반에, 특히 9월공세 때에는 남한 전체가 내전에 돌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게릴라활동이 격심해졌다.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의 총동원령, 남로당 중앙부의 당원 재산납부령, 게릴라 교전횟수 및 동원인원, 활동범위 등을 분석해보면 무장투쟁은 유격전의 마지막 단계인 최후 돌격전의 양상을 띠었다.
그 뿐만 아니라 2,345명의 무장부대요원들이 북한으로부터 10회에 걸쳐 남파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의 발단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이 전면 남하공격을 가해오기 훨씬 이전인 1949년 후반기부터 찾을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은 게릴라전쟁의 연장 내지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이 완전히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왜 9월공세 때 전면남침을 감행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답이 구해져야 된다. 9월공세는 분명히 북한 정규군의 남하협공을 전제하고 감행했을 것인데, 북한측은 남하협공은 고사하고 남로당 게릴라들이 요청했던 무기원조도 한국전 도발 직전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로 김일성과 박헌영 집단간에 야기된 주도권 쟁탈전의 측면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 다음 사항들이 더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미국의 안보회의문서 NSC48이 1949년 12월에 승인되어 한달 뒤에 애치슨 선언으로 대외에 알려질 때까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불명확했다.
이는 북한위정자들이 대남 전쟁정책을 결정하는데 가장 불확실한 부분이었다.
둘째, 9월공세때 전면 남하협공을 감행하기에는 무엇보다 전쟁수행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한국전 남침때 선봉에 섰던 북한 정예군 병사들이 중국으로부터 귀환한 것은 1949년 후반기부터 1950년 초까지이고, 이에 관한 협정이 하얼빈에서 체결된 것은 1950년 1월이다.
이상의 지적은 전쟁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남로당 수뇌부가 주도권을 쥐기 위해 ‘아성공격작전’을 감행했다는 면에서 파벌투쟁의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스탈린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토착세력의 성장을 가능하면 억제하려 했다.
어쩌면 남로당의 게릴라운동에 대한 김일성집단의 지원이 그토록 소극적이었고, 마침내 김일성이 직접 운용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게릴라운동의 실패원인과 그 의미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해방 후에 남한에서 전개되었던 게릴라운동을 한마디로 간단하게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했던 목표가 공산주의 통일국가 수립이었고, 이것이 좌절되었으므로 남로당의 게릴라운동도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분석의 대상을 남로당의 투쟁에 한정시키고 그들이 전개했던 게릴라운동의 실패요인을 분석하면서 그 특수성과 보편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게릴라운동에 있어 성패의 가름은 대중 호응도와 대중 동원능력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클라우제비츠, 마오쩌둥, 지압 장군(Vo Guen Giap)의 사상에서도 보여진다.
이는 심지어 ‘이동전략거점이론(foco)’을 근간으로 삼았던 E.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에게도 가장 중요시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남로당이 전개했던 게릴라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실패요인들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일제 36년간의 암흑기에서 막 벗어나 즉각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소련과의 연계에 의한 신탁안 지지는 대중동원력을 약화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의 찬탁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당시 남한인구의 80%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혁명의 주체세력을 중소도시의 노동자로 삼았다는 데에도 실패요인이 있다.
둘째, 1946년 가을봉기의 실패는 전평 전농 지방인민위원회 등 지방 노동자.농민조직을 붕괴시켰고, 많은 간부들의 상실을 초래했다.
아울러 극우진영과 미 점령군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중도세력의 지지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그 결과 남로당의 ‘정치적 하부구조’는 붕괴되고, 극우집단에 맞설 대중 동원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혁명이론가들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무장봉기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봉기의 주관적, 객관적 조건들’이 가능한 한 최대로 무르익어야 한다.
그런데 영남폭동이나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봉기의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사태가 돌발적으로 발생하고 난 뒤에 당 노선이 그 뒤를 따라 다니며 이를 정당화시켜 주는 형국이었다.
그 결과 그나마 성장해 있던 ‘혁명역량’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남한에서 전개된 공산주의 게릴라운동의 실패원인에는 군사전략적 측면들도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점은 ‘병단’이든, ‘도당 유격대’든 거점을 중심으로 하는 ‘해방지구’를 설립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마지막 투쟁단계에서 남로당의 목표와 방향은 북한으로부터의 남침에 호응하는 태도, 즉 외부의존과 이에 의한 단기속결주의에 두고 있었으므로 해방지구건설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이승만정부가 백살일비(百殺一匪), 견벽청야
(堅壁淸野)작전 등으로 게릴라운동의 여지를 철저히 제거한 것이 중요한 억제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T. 스카치폴(Theda Skocpol)의 지적처럼 갈등은 기존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국제상황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갈등은 각각의 혁명상황이 최초에 어떻게 대두되었는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갈등의 논리는 혁명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계급이나 집단에 의해 지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혁명적 갈등은 그 갈등과 관계되어 있는 특정집단이 전혀 예견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고, 그 집단의 이익에 완전히 합치되지도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난 세기말부터 한민족은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다양한 방향으로 노력했다. 유럽에서와는 달리, 해방후 한국의 국가 건설에서는 다양한 이념과 시각들이 제도권 내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하지 못했다.
당시의 정치전략가들이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폭력적 수단으로 대표성을 확보하려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갈등요인들이 증폭되어 정치·군사화하면서 게릴라운동이 발생하였다.
그 게릴라운동은 전개과정에서 북한 위정층의 전쟁노선에 보조적 수단으로 쓰이게 되면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대참극과 분단체제의 심화를 초래했다. 이는 앞으로 남북한이 통합되는 과정에서도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는 역사적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19일(월)자에 ‘한국의 전시독재와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허만호(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mhheo@bh.kyungp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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