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여기저기 여린 손을 내미는 풀들을 뽑습니다. 아직 떡잎 때는 외떡잎 식물인지 쌍떡잎 식물인지만 구별이 될 뿐 이놈들이 자라 바랭이가 될지, 강아지 풀이 될지, 갈퀴나물이 될지, 비름이 될지 알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풀들이 자라서 제 꼴을 드러내기를 기다릴 여유가 있을 때도 있지만 궁금하더라도 떡잎 적부터 뽑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 모습을 드러내 꽃망울을 맺고 열매가 익기를 기다리다가는 뿌리가 단단히 박히고 마음껏 활개를 쳐서 농사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한창 자라는 놈을 내버려두었다가는 며칠 안 가서 김매기가 열곱 스무곱 더 힘들어집니다.하루 이틀 사흘… 밭고랑에 엎드려 풀을 잡아주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날짜가 얼마가 지났는지 아득해집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해와 달과 철이 크고 작은 가락지같이 맞물려 돕니다. 그걸 순환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나 이 크고 작은 가락지의 맞물림은 시간의 비밀을 제대로 드러내기에 미흡합니다. 삶과 연관되지 않은 시간, 생명계와 잇닿아 있지 않은 순환의 질서는 중력에 의한 수직 방향의 운동과 타성에 의한 수평 방향의 운동, 다시 말해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합력이라는 추상화되고 공간화된 등질적 시간의 관념만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시간의 비밀은 생명에 있습니다. 참된 시간은 생명의 시간입니다. 생명현상 속에서만 시간은 창조와 진화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저더러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큰 흐름을 들라면 저는 시간의 단축과 공간의 확장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로 공간은 거의 무한하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유전자 지도는 완성 단계에 있고 태양계의 비밀이 밝혀질 날도 머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입니다. 공간에 연관된 모든 학문은 말 그대로 ‘겉핥기’입니다. 시각과 의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평면과학입니다. 시간의 단축과 공간의 확장은 정비례합니다. 줄어든 시간은 늘어난 공간으로 바뀝니다. 기술 문명의 세계에서는 점점 속이 없어지고 겉치레가 우리의 눈을 현혹합니다. 유전자가 조작되는 세상에서 돼지 곱창과 사람의 창자는 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바꿔치기가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언젠가 머지 않은 미래에 돼지 모습을 한 사람과 사람 모습을 한 돼지가 공존하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하고 꿈에 부풀어 있는 듯 보입니다.
생명 에너지의 특성은 확산이 아니라 응집에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시간의 본질은 가락지 모습의 원환이나 점점 둘레의 크기가 늘어나 확산하는 나선이 아니라 둘레의 크기가 차츰 좁혀지는 응집하는 나선 모습을 닮았다는 사실을 직관하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요? 사람은 철이 들면서 다시 말해서 생명의 시간을 내면화하면서, 속이 깊어집니다. 이 속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평면과학 공간과학은 이 속을 알 수 없습니다.
낭비되는 생명 에너지는 쓰레기로 쌓입니다.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은 쓰레기를 남기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쓰레기 가운데 눈에 띄는 쓰레기는 우리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대응 방안으로 생태·환경 운동이라도 낳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정보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양산되는 의식의 쓰레기는 처치할 길이 없습니다.
먼 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 종일 오리 걸음으로 고추밭을 맵니다. 어제 오늘 꼬박 이틀을 헤맨 거리가 늘잡아 200㎙쯤 될까말까입니다. 그래도 많이 움직인 셈입니다. 살아있는 시간을 가장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 어린 풀들이 제자리에서 삶의 문제를 다 해결하고 있는 데에 견주면요.
/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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