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는 요즘 독일 각지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하다.동서독 첫 정상회담이 열렸던 에어푸르트에서 고속열차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바이마르는 유럽연합(EU)집행위원회가 지정한 1999년 유럽의 문화도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보존 지역이기도 하다.
또 세계적인 문호이자 독일의 정신적 스승인 볼프강 폰 괴테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옛 동독 지역에 있는 탓에 바이마르를 찾는 서독인들의 발길이 과거에는 뜸했지만 지금은 말로만 듣던 괴테를 만나기 위해 젊은이들을 포함해 많은 독일인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 있다.
인구 6만여명 밖에 안되는 소도시 바이마르 곳곳에는 괴테가 26세부터 82세로 사망할 때까지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1857년 세워진 괴테의 동상이 있는 테어터플라츠 국민극장앞은 독일 문화의 상징적인 장소로 유명하다.
마르크트 플라츠 인근 괴테하우스도 괴테가 생전에 작업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처럼 괴테와 바이마르가 각광받고 있는 까닭은 바로 독일 정신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1990년 통일이후 이념, 빈부등의 차이로 동서독 주민들간에 극심한 괴리감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동서독을 정신적으로 이어주는 가교가 없는 상황에서 지난해 마침 괴테 탄생 250주년을 맞아 독일인들은 괴테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바이마르에서 성대한 행사를 벌여 민족의 동질감을 맛보았다.
괴테는 옛 서독의 사실상 수도나 다름없는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의 가도에 위치한 독일 중심인 튀링겐주의 각 도시들을 연결해주는 역사적 인물이다.
유럽중앙은행(ECB)과 도이체뵈르제(증권거래소)가 있는 유럽 금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는 괴테의 탄생지다. 서독의 자본주의와 동독의 사회주의를 잇는 끈은 바로 독일 문화의 주인공인 괴테였다.
바이마르의 괴테하우스(프랑크푸르트에도 있음)에서 만난 한 관광객은 “괴테의 작품들을 잘 읽지는 않지만 동서독 주민들은 괴테가 게르만의 정신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동과 서로 나뉘어 있었지만 그 문화의 뿌리는 똑 같다는 말일 것이다.
바이마르는 또 공교롭게도 1919년 독일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 채택됐던 곳이다.
이 헌법으로 제정시대를 마감하고 정치적 권위는 국민에서 나오도록 하며 결사 집회 신앙 등 기본권의 자유를 보장하는 독일 최초의 공화국이 이 곳에서 탄생했다.
비록 14년만에 바이마르공화국은 나치스 독재에 의해 무너졌지만 게르만의 뇌리에는 ‘황금의 20년대’가 생생하게 아로새겨 져 있다.
베를린에서 최근 바이마르로 이사를 왔다는 루돌프 잉거씨는 “베를린은 통일 이후 매우 혼잡하다”며 “조용히 괴테가 걸었던 산책길을 다니며 통일의 의미를 반추해본다”고 말했다.
과거의 정치와 문화를 통해 절묘하게 현재가 투영된다.
바이마르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약 1시간 남쪽으로 달리면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탄생지인 아이제나흐가 나온다.
인구 4만 5,000명의 소도시 아이제나흐는 통일 이후 오펠자동차의 생산공장이 들어서 자동차 엔진소리로 요란하다. 2000년 새 밀레니엄을 맞아 이 도시에서는 지난 5월부터 바흐축제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중앙역에서 카를스트라세를 지나 바흐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바흐하우스로 찾아 가던중 우연히 만난 한 노부부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정교함속에 웅장함이 깃들어 있다”며 “이는 바로 게르만의 정신”이라고 자랑했다.
구 동독지역에 있던 이 도시는 그런대로 보존이 잘됐으며 시 중심가에는 독일 유명기업들의 체인점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바흐하우스에서 약 200여㎙떨어진 곳에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가 살았던 루터하우스가 있다. 바로 옆에는 성 게오르크 교회가 있는데 이곳에서 바흐가 세례를 받았다.
루터는 아이제나흐시가 내려다 보이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동서독 첫 정상회담이 열렸던 에어푸르트를 남과 북으로 독일의 정신과 문화가 감싸고 있는 듯 하다.
게르만은 동과 서로 나뉘었어도 문화와 정신, 종교만은 언제나 ‘하나’였다. 통일의 원동력은 바로 여기서 나왔으며 통일 후유증도 서서히 치유되고 있다.
바이마르·아이제나흐= 이장훈기자
truth21@hk.co.kr
■'동독 민주화의 성지'-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
89년 시위로 통독 촉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1989년 여름 출간한 회고록(Erinnerungen)에서 “라이프치히와 동독의 다른 도시들에서 어느날 수백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이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 들고 일어날 지 모른다”고 동독의 미래를 예측했다.
그의 예언은 몇 달이 지나자 마자 ‘실제’상황이 됐다.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일인 1989년 10월 7일. 라이프치히 중심지에 있는 성 니콜라이 교회에 수백명의 경찰이 난입, 민주화를 요구하며 평화적으로 기도를 하던 시민들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체포·구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165년에 건립된 이 교회에서 민주화단체 회원들과 신자들은 1980년대 초부터 매주 월요일 동독 정권의 반인권정책에 항의하는 평화기도회를 열었다.
평소 눈엣 가시처럼 생각했던 동독 정권은 이날 폭력적인 탄압을 자행했고 이는 민주화의 불씨를 당기게 됐다.
라이프치히 시민 수천명은 이틀 후인 10월 9일 촛불시위를 했고 민주화의 불길은 각 도시로 번져갔으며 급기야는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까지 이어졌다.
라이프치히 하우프트반호프에서 10여분만 걸어가면 보이는 성 니콜라이 교회는 1539년 종교개혁과 함께 신교로 개종했으며 바흐가 이 교회의 합창지휘자겸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기도 했다.
이 교회 인근에는 역시 유서깊은 성 토마스 교회가 있고 괴테가 공부했던, 독일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라이프치히 대학이 있다.
루터와 바흐, 괴테의 혼이 한데 어우러진 라이프치히는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성 니콜라이 교회 주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음식점들이 몰려있다.
민주화 덕분에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 음식점의 종업원들은 이미 사회주의적 구태를 벗고 능숙한 솜씨로 가끔씩 바가지도 씌우면서 손님들을 접대한다.
가까운 광장에서는 정치집회도 자주 열린다. 외국인이 길을 물으면 젊은 대학생들은 유창한 영어로 대답한다. 하지만 허름한 차림의 나이 지긋한 시민들은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한 종업원은 “통일이 좋은 이유는 돈을 능력껏 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옛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진더만씨는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고 대비했지만 촛불과 기도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동독인들은 과연 통일이후 시장경제에 대한 대비는 했었을까.
라이프치히= 이장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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