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 김민지최근, 각종 기술의 놀라운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안락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으며, 인간 수명도 근대 이전에 비하여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불쾌함을 극단적으로 피하는 경향을 조장하고, 쾌락에는 둔감하며 안락함을 당연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그래서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만족스러운 안락함으로 평가받던 것이 오늘날의 불쾌함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우리는 발달한 기술이 선물해 준 위생적이고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져서 신체적 저항력을 잃어 가고 있다. “화성침공”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향유하던 화성인이 지구에 침입했을 때, 고향의 무균 환경과는 다른 지구의 환경에서 박테리아에 의해 자멸해 버린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이 내용은 현재의 문명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와는 다른 미개의 정글 등의 환경에 노출된다면 위의 소설에 등장하는 화성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은 안락함에 길들여져 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안락함에 익숙해진 현대인이 당면한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쾌적한 환경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지금 주어진 안락함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 게다가 약간의 불쾌함에 불평하고, 조금 더 쾌적한 삶을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불쾌함이란 것 중에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쾌적함으로 여겨졌던 것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거의 모든 현대인들은 부지불식간에 사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현재의 안락함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안락을 당연시하고 조금의 불쾌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잘잘못의 문제를 벗어나 인류의 생존에도 치명적인 문제이다. 마음과 몸이 모두 쾌적함만을 좇고 불쾌함을 견딜 수 없게 된다면, 조그만 환경의 변화에도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인류의 건강한 생존을 위해서 우리는 약간의 불쾌감 정도는 견딜 수 있는 신체적 내성과 정신적 극기를 기를 필요가 있다.
■우수 1 이지영
지난 겨울 한 미술관에서 ‘느림’을 주제로 기획전이 열렸다. 주지했듯이, 여지껏 발전과 진보의 상징이었던 빠름과 속도에 대한 반성을 하고 우리 자신의 고유 속도를 찾자는 것이 이 전시회의 취지였다. 이처럼 우리는 근대화 이후로 개발과 발달을 지향하면서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왔다. 하지만 돌아보건대, 삶의 수준 문제에 관해서는 오히려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인류 발달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최근의 ‘인간을 위한 진보’는 한편으로 ‘생명의 균형 파괴’와 닿아 있었다.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없이 편해지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각종 편의 시설과 도구가 갖추어지면서 우리는 점차 그것들에 중독이 되어갔다. 대표적으로 여름이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으로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에어컨이 실내 온도를 낮추는 만큼 바깥의 땅과 공기의 온도는 올라가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에어컨 바람에 과도한 노출로 더운 여름에 냉방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에 더하여 정신적으로 우리는 점차 복잡한 사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TV와 같은 영상 매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면에 뜨는 영상이 뇌리에 오래 남아 있기 위해서는 인상적이고 상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시청자에게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말초적 신경에 호소한다.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편해지는 데는 어느 정도의 대가가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대가가 결국 생태적 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 일방적인 진보는 생태적 불균형을 야기하고 종국에는 인간을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건강성으로 이어지는 생태적 건강성은 간편함과 편리함에 있지 않고 약간의 불편과 귀찮음을 참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발달의 역사는 인간에게 쾌락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불쾌를 참을 수 있는 자세를 지금 요구하고 있다.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는 진보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인류의 생존 기반인 생태계를 염두에 둔 발전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
■우수 2 박혜원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즉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면 한단계 높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성향은 인류 문화를 진보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는 과거보다 더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이로 인하여 과거의 쾌락적인 삶의 한 양상이 오늘날에는 고통스러운 삶의 양상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즉 쾌락의 기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바뀐 것이다.
콘덴트 로렌츠는 ‘현대의 대죄’에서 근대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여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불쾌를 피하는 경향은 두드러진다고 서술하였다. 즉 현대의 쾌락을 추구함에 따라 과거의 쾌락은 고통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콘덴트 로렌츠가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자동차가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걸어다닐 수 있었던 단거리도 오늘날에는 자동차를 이용하여 편리함의 쾌락을 추구한다. 즉 현대인에게 과거와 같이 도보를 권장한다면 현대인은 그것을 고통으로 여길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에는 어떤 고통도 없이 한 일이 현대의 과학문명으로 고통으로 변모된 관습이 허다하다. 또 문명의 발전 속도가 가속화함에 따라 고통으로 인식되는 것들이 더욱 많아지는 추세이다. 이는 진정으로 즐겁고 쾌락적인 삶의 추구라 말할 수 없다.
진통제를 처음 투약할 때는 효과가 크다. 그러나 투약 횟수를 반복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많은 양의 약을 투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쾌락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쾌락을 추구할수록 그에 따르는 고통은 증가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과거에 안주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에 비추어 과거의 행위가 고통스럽다고 여기기보다 과거를 현재를 위한 밑바탕으로 인식해야 한다.
■강평 손동현
로렌츠에 따르면 신경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생명체는 두 가지의 자극에 의해 행동에 영향을 받는데, 이미 하고 있는 행동을 더 하도록 강요하는 ‘강화(强化)자극’이 그 하나이고, 그 행동을 억제시키는 ‘소거(消去)자극’이 다른 하나이다.
인간의 경우에 있어 강화자극은 쾌감과 결부되고 소거자극은 고통 또는 불쾌감과 결부된다. 문화적 사회생활에서는 상(賞)과 벌(罰)이 각각 그것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러니까 생명적 차원에서 볼 때 쾌감과 고통은 어떤 생명에 유익한 어떤 행동을 유발시키는 자극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이 쾌와 불쾌의 원리는 획득해야 할 생명적 이득과 지불해야 할 생명적 대가를 저울질하게 하는 장치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저울대’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이 두가지 자극의 강약(强弱)과 과다(寡多)에 따라 상대적으로 움직인다는 데에 있다.
에서 쾌와 불쾌의 ‘경제적 시황(市況)’이 변동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비유적인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즉 쾌의 자극이 강하고 많아지면 그것의 자극으로서의 작용력이 그만큼 약해지고 줄어들며 반대로 불쾌의 작용력은 그만큼 강해지고 늘어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시세(市勢)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만일 이 저울대가 한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면 어떠할까. 시장에서 수요 공급의 균형이 깨어져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면 어떠할까. 꼭 필요한 생필품인데도 값이 싸고 지천으로 널려있으면 그것이 소중한 줄 모르고 소홀히 할 것이며,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지만 아주 희귀하여 값이 비싸면 그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생명에 꼭 필요한 유익한 것인데도 그것을 유도하는 쾌의 자극이 너무 많아 약해져 있고 그 반작용으로 불쾌의 자극은 작용력이 커져 있으면, 그것을 획득하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피하려고 할 것이다.
자연상태에서 사냥에 나선 동물은 온갖 고통을 무릅쓰며 먹이를 뒤쫓는다. 그리고 문화상태에서 사는 인간도 단순한 쾌락이 아닌 참된 기쁨은 노고(勞苦), 즉 불쾌를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상태에서 근대 이후의 인간은 고통과 불쾌를 피하고 쾌감을 얻는 방도를 많이 개발해 왔다. 그래서 쾌락은 더 이상 생명적 유익을 얻으려는 행동을 유발시키지 못하고 권태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 대신 고통은 이러한 행동을 더 강하게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로렌츠는 이런 상황이 실제로는 생명적 힘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문화적 존재라고는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인간 역시 자연적 존재요 문화의 기초는 자연인만큼 인간의 삶에서도 생명적 힘이 쇠퇴하면 문화 역시 쇠퇴하고 만다는 것이 로렌츠의 견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이러한 ‘허약화’의 증세를 지적하고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시킬지를 설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몸이 안락함에 길들여져 내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소설 내용을 예로 들어 설명한 김민지(구정고)양은 주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의 종결을 “신체적 내성과 정신적 극기”를 기르자는 말로 장식한 점도 함의가 깊어 좋았다. 일상적 주변에서의 예가 한번쯤 더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주제를 잘 파악하고 논지를 명료하게 전개한 점을 높이 사 최우수작으로 뽑는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함을 글의 출발로 삼은 박혜원(성지여고)양도 교통수단의 발달, 진통제의 투약 등을 예로 들어 문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인식이 커지는 맥락을 잘 설명해 좋은 논설문을 썼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생명적 힘의 약화로 인한 문화의 쇠퇴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하면 “사회적 건강성으로 이어지는 생태적 건강성”을 언급하고 있는 이지영(명덕외고)양이 주제 파악에 있어 좀 더 정확했다고 보겠다. 이지영양은 에어컨, TV 등을 예로 들어 무뎌지는 쾌락의 자극을 설명하였던 점도 적절하였다. 그래서 이지영양의 글을 우수작 1로, 박혜원양의 글을 우수작 2로 선정한다.
/손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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