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지속이 성패 척도정상회담은 위험스런 것이지만 기회란 측면에서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정상 간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두 열쇠는 ‘완벽한 준비’와 ‘현실적 기대’다. 준비나 기대 둘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유감스러움과 당황함을 넘어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남한 정부에는 정상회담에 대해 경험많고 능숙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있다. 김대통령이 취임 초 일본·중국·러시아 정상들과 가진 정상회담은 큰 성공을 거뒀고, 이는 곧 ‘햇볕정책’을 추구해온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지난해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이탈리아·프랑스·독일 정상과 연쇄회담을 가진 최근의 유럽순방 등은 김대통령이 세계 최고 지도자들과 만날 때 얼마나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회담으로 한국은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역사상 가장 강한 외교적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회담 준비 과정은 철저했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 남북 정상회담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김정일이 회담을 주재할 수 있도록 평양에서 남북정상이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며 또한 적절한 것이다.
1994년 사망한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평양에서 만나기로 계획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상회담은 6년만에 재연되게 됐다. 아버지가 깔아놓은 길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김정일은 상당부분 부담을 덜게 된다.
정상회담에 관해선 우선 두 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무엇을 논의할 것이며, 어떻게 회담을 이끌어갈 것인가. 첫번째 의문의 답은 두번째 의문의 답을 결정할 것이다. 의제가 논의되는 동안 회담을 건설적으로 이끌기 위한 세심한 주의가 뒤따라야 한다.
양 정상은 이 과정에서 다소간 긴장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양 정상 중 한 사람이 뜻밖의 ‘선물’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정말 놀라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선물을 받는 상대방이 같은 관대함으로 응답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남북 정상회담의 장단점에 대한 내 견해는 9년반 동안 백악관에 근무했을 때 형성됐다. 나는 처음에는 국가안보회의(NSC) 일원으로, 나중에는 조지 부시 당시 부통령의 국가안보담당 고문으로 백악관에 근무했다. 몇몇 아시아 정상의 워싱턴 국빈방문을 준비하면서, 부시 부통령의 65개 국가 방문길을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부시는 해외 방문을 통해 왕 여왕 천황을 비롯해서 몇몇 독재자, 수많은 장군 대통령 총리 등을 만났다. 부시는 외국정상과 처음 만나면서 그들이 누구고 재임중 어떻게 일처리를 해왔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해갔다.
예를 들면 85년 콘스탄틴 체르넨코 옛소련 서기장 장례식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처음 만났을 때 부시는 고르바초프가 구상하고 있는 소련 내 변화의 가능성을 느꼈다. 부시는 고르바초프와 유대감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1990년 6월 모스크바가 서울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데 바탕이 된 한·소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정상회담의 과실은 때로는 씁쓸하고 때로는 달콤하다. 남북 양측은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 기대감을 오히려 적게 가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빌리 브란트 전독일 총리와 89년 10월 서울에서 가졌던 만찬을 생생히 기억한다. 브란트 총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뒤였다. 브란트는 DMZ 광경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DMZ를 “뒤틀린 시간”이라며 “베를린장벽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찬을 주재한 한국 당국자들에게 DMZ가 관통될 경우 나타날 ‘심리적 이탈현상’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을 때 독일 국민이 해결해야 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대통령은 평양 정상회담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끌어낼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알 수 없는 것은 김정일이 회담 테이블에 무엇을 갖고 나오고,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얼마나 많은 유연성과 행동여지를 내 보일까 하는 점이다.
내 생각으로는 평양 정상회담에서 4가지 현실적인 희망을 품어볼 만하다. 회담이 성사됐다는 것이 첫번째다. 북한측을 다룬다는 것은 어렵고도 예측하기 힘든 일이다. 정상회담은 엄청난 상징성 자체로 매우 축복스런 일이다. 두번째는 양 정상이 서로에게서 좋은 점과 존경할 만한 점을 찾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상회담에서의 상호 호감은 중요한 윤활유며, 그 자체가 미래를 위한 건설적 요소가 된다. 셋째, 이산가족이 서로 연락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대한 진전이 이뤄질 것이다. 이는 정상회담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다. 넷째, 정상회담의 계속화가 논의될 수 있다.
정상회담이 지속적인 중요성을 띠기 위해서는 회담이 또다른 접촉으로 이어져야 한다. 다음번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는 합의는 첫 정상회담의 성공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前주한美대사
* 약력
1927년생
미 윌리엄스대 졸
1951-79년 미 중앙정보국(CIA) 근무
1973년 주한 미 대사 특별보좌관
1980-89년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 담당관·부통령 안보담당고문
1989-93년 주한 미대사
1996년 뉴욕 코리아 소사이어티 이사장 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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